조은 지음/마음산책/192면/2001
굽이굽이, 이제는 서울 시내에서 찾기 힘든 몇 안 남은 좁은 골목길을 따라 가면 시인
조은의 집이 나옵니다. 그 앞에 서서는 초인종을 누르지 말고 힘차게 이름을 불러줘야 합니다. 호명된 사람이 내다 보기도 전에 자존심 센 강아지
또또가 캉캉 짖어댈 것이고 걸걸한 목소리의 술집 마담,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막 외무부에 출근하기 시작한 아가씨와 연극배우, 회사원, 여행사
직원, 정신병 환자 등이 기웃기웃 밖을 내다볼 것입니다.
혼자 사는 여자 시인의 삶에 솔깃 호기심이 동할 법도 하고 보통 사람들은
모를 근사한 뭔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뒤적거려봅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그냥, 삶입니다. 어둠 속 낯선 이가 무서워 대문에 종을 달고,
극성스런 아줌마 부대와 일전을 치르고, 주인 잃은 개 또또의 시집살이에 비위 맞춰가며 살아갑니다. 때로는 ‘왜 절름발이한테라도 시집 가지 못
하느냐’며 분노 섞인 아버지의 타박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이 이것저것 닦아내고 부엌 한쪽에 던져둔 행주 같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물에 씻겨진 깨끗하고 단단한 차돌 같고, 때로는 씹을수록 제 맛이 우러나는 맨밥 같습니다. 그 뒤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감과 자신감이 스며 나옵니다. 시를 쓰지 않았더라면 경제적으로 좀더 풍족한 삶을 살았을 테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혼자 삶에 대한
불안으로 저축을 늘리는 대신 친구와 술을 마셨고 여행을 했습니다.
역시 정갈한 김홍희 작가의 사진을 들여다 보다 한 장의 사진을
오래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김과 김치, 밥과 된장찌개, 수저 한 세트만 놓인 밥상이었습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는 이것보다 더 많은 게
필요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이 글을 통해 나는 그동안 자신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고, 서툴게나마
삶을 사랑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