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쿠에코 지음/열림원/김민정 옮김/272면/2003
이 책을 재미있게 읽으려면 먼저 준비가 필요합니다.
저자와 친해지는 것도 필수. 앙리 쿠에코가 프랑스인이고 화가이면서 예술이론가라는 사실을 우선 알아둡니다. 관념적이고 사소하다고 느껴지는 것들을
자꾸 파고들어 어떤 때는 약간 짜증이 난다 싶은 프랑스 에세이의 특징도 미리 각오해야 합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매일 감자를 그리던 화가가
모델이 된 그 감자들을 두고 쓴 일기입니다.
쪄먹거나 구워먹으면 맛있다, 울퉁불퉁하다, 구황작물이다, 누런 색이다, 뿌리가 아니라
덩이줄기다. 몇 가지만 말하고 나면 이야기거리가 바닥나는 감자를 두고 몇 년 동안 일기를 쓰다니! 등장인물 소개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아직 이름도 없는 단역배우들이다. 그것들의 특징은 상처가 났다거나 기형이라거나 중병에 걸렸다거나 탕녀라거나 늙었다거나 천박해 보인다는
것뿐이다. 알아볼 수 있는 것들을 쭉 늘어놔보자”
“우아한 로자, ... 렘브란트의 노모, 소시지, 뚱보 베르타, 통통이, ...
지쳐 쓰러진 것, 문둥이, 푸른 각질, 대문자 X, 조가비, 외눈이, 독녀, 초록 애송이 그리고 동글동글 조그만 감자가 셋.” ‘렘브란트의
노모’라는 감자는 1989년 2월 13일 일기에 다시 등장해서 황량한 달 풍경 같다는 촌평을 듣고 있습니다. 어두운 배경 속에 커다란 손을 책에
올려두고 쭈글쭈글한 얼굴만 노랗게 빛나던 렘브란트의 어머니를 떠올려봅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감자는 가끔씩 그 자체로 의미있는
사물이 되지만, 사물을 두고 쓰여진 에세이가 늘 그렇듯 지은이의 감정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1991년 어느 여름날의 일기에는 어머니의 모습이
감자가 가득 담긴 자루 같았다고 적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병원에 있던 병든 어머니는 곰팡이 핀 녹말덩어리였다고 했군요. 어떤 것이든
오래 응시하는 것에는 의미가 깃들게 마련일까요? 사물이 아니라 감정이 문제였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