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자의식 없는 생산력을 원해!

양화 2007. 7. 15. 13:14

마당에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이 총총하다. 반짝이며 날아오르는 반딧불이 몇 마리가 빛을 보탠다. 강물 흘러가는 소리가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뒤섞여 울안을 넘어 들어온다. 강 뒤편으로는 희미한 산 그림자가 사람의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p. 208

 

"삶이란 우리가 살아온 그것이 아니다. 삶이란 우리가 추억하는 그것, 혹은 우리가 어떻게 추억하느냐인 것이다."라고 마르케스가 그랬던가. 우리가 추억이라고 믿는 불완전한 기억들에 기대어 한 생을 견딘다는 일의 서글픔. 지난 시간들이 깔려있는 이 길에서 내가 밟고 가는 것은 한 묶음의 추억인가. 결국 길 위에서 나를 서럽게 하고, 웃게 하고 눈물짓게 하는 모든 것은 그 길 위에 선연한 울림으로 남아있는 기억들인 것이다.

아직 가지 않은 길 위에 내가 남기게 될 기억들은 또 무엇일까.

... 우리가 언제 다시 만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함께 걸은 며칠의 시간은 살아가는 동안 먼 기억의 저편에서 불현듯 떠올라 우리를 웃게 해 줄 것이다.     p. 299-302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1, 김남희 지음

 

내겐 편안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게 어색하다. 그 허전함을 메우느라 나는 온갖 소품을 동원했다. 스케치북, 일기장, 카메라. 나는 그림을 그려보다가, 글을 쓰다가, 다시 카메라 렌즈로 풍경을 들여다본다. 모든 게 힘겨운 노력이다. 나는 자의식으로 가득 차서 절실하게 애를 쓰다 숨이 막힌다.   p. 61

 

쓸모없이 수액을 빨아들이기만 하는 덧가지처럼, 슬픔과 두려움과 죄책감은 내 마음과 영혼에서 에너지를 고갈시켜 왔으리라는 것이 새삼 확연하다. 깊이 뿌리를 내린 그런 감정들은 쉽사리 '잘라낼' 수 없다. 그 감정들이 솟아난 부분을 찾아내어 끈기 있게 여러 번 보듬어 주는 것만이 그 근본을 알아낼 수 잇는 유일한 방법이다.    p. 84

 

진정한 문제는, 온갖 두려움을 무릅쓰고라도 새로운 방향으로 탐험을 떠날 만큼 내가 간절히 바록 있는지 하는 것이다.    p. 94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자기 본분을 지켜 존재하는 것. 포도주스를 포도주로 변모시키는 효모도 같은 원리이다. 녀석들이 관심을 갖는 건 작은 효모들을 더 많이 만들 수 있도록 포도에 들어있는 당분을 먹어치우는 일뿐이다. 자의식이 전혀 작용하지 않는 생산력.               p. 96

 

철 지난 채소를 모두 뽑아버릴 자신만 있다면, 겨울 텃밭을 새로 가꿀 수 있을 것이다.   p. 118

 

감은 모든 식물을 고사시키는 서리를 맞고 난 다음에야 단맛이 높아지고, 열대 햇빛을 닮은 관능적인 육질이 살아난다.... (그러니) 폭풍이나 된서리 같은 고통은 달콤하고 소중한 인생을 음미하기 위한 기폭제일지도 모른다(...).              p. 121

 

고통스러움은 우리가 그 순간의 진실을 얼마나 강렬하게 거부하고 있는지, 그 정도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p. 134

 

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정에서 우리는 자신 속에 들어있는 겹겹의 세상들이란 결국 숫자 '8'을 옆으로 뉘어놓은 것처럼 우리가 타인들이나 바깥 세상과 맺은 반복적인 관계의 반추에 지나지 않음을 발견한다. 우리 각자는 세상 그 자체이다.   p. 144-145

 

제이슨이 우리에게 남긴 선물은 현재의 소중함과 삶이 얼마나 한순간에 망가지기 쉬운지를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었다. ... 자연이 과거를 산산조각 내어 만든 자양분이라고 할 수 있는 퇴비를 텃밭의 흙을 다시 비록하고 풍요로운 옥토로 만든다.(...)    p. 152

 

텃밭에서 발견한 충만한 삶, 알린 번스타인 지음

 

그러니까 나의 문제는 어떤 것도 절실히 경험해본 적이 없으며, 어떤 것도 간절하게 원해본 적이 없고, 어떤 감정도 바닥까지 닿아본 적이 없다는 데서 온 것이 아닐까. 진짜는, 자의식이 없는 생산력 같은 것. 간절히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나면 오는 어떤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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