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말똥구슬

양화 2007. 6. 18. 17:22

비가 그치다

 

차츰 서쪽 하늘 환해지더니

뭇 새들 하늘에 날아오르네.

젖은 구름 아직도 가랑비 내리고

나뭇잎은 우수수 소리를 내네.

기운 국화 이제야 바로 서려 하고

비 맞은 석류 윤기 반(半)은 덜하네.

어느새 석양이 뉘엿뉘엿 지고

먼 길에선 장사꾼 외치는 소리.

 

漸漸西天豁, 飛飛衆鳥生. 濕雲猶細霧, 風葉忽群鈴.

訛菊初思整, 洗榴半減明. 於焉已夕日, 遠道商人聲.                      p.95

 

강고개를 넘으며

 

1

9월이라 호젓한 산중(산중)에

패랭이꽃 길가에 피었어라.

무심히 한 송이 꺾어

손에 들고 길을 가노라

 

空山九月中, 石竹開蹊右. 無心折一花, 行行且在手.

 

2

맑은 물 속 모래가 희고

가지런한 풀에 저녁 햇빛 선명하여라.

산길에는 인적이 뚝 끊어져

나뭇잎이 발자욱 소릴 내누나

 

녹水纖沙白, 平莎晩日明. 山蹊行子絶, 木葉作공聲.

 

3

걸어서 산골짝 다 지나고

한낮에 높은 고개 넘어가누나.

먼 들에 구름 그림자 아득도 하고

외딴 마르에 닭 우는 소리 고요하여라.

 

徒步窮山谷, 日中上崇嶺. 逈野雲影漠, 孤邨鷄聲靜.                 p. 58

 

병으로 누워 지내며

 

하늘이 내게 칠십까지 허락한다면

내 앞에 남은 해 스물세 해군.

수십 년 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쩐지 꼭 수년 전 같네.

여기저기 나그네로 떠돌았었고

집에 오면 늘 굶주리었지.

옛사람의 글을 좀 보긴 했어도

천하를 놀라게 하지는 못했네.

이전부터 담박함을 좋아하여서

몸이 더렵혀질까 늘 걱정했었지.

사람을 만나는 건 꺼리지 않아

기탄없이 말하되 재주는 감췄네.

지금 병들어 누워 있으니

창가의 나무 퍽 청초하여라.

맑은 바람 뜨락의 나무에 불고

장미는 꽃망울이 맺혀 있고나.

몸 굽혀 새로 지은 시를 적다가

고개 들어 피어오르는 흰 구름 보네.

술을 본래 좋아하는 건 아니나

흥치에 이르면 술잔을 드네.

사내 자식 어리석어 책 안 읽어도

딸아이는 내 흰머리 참 잘도 뽑지.

벗은 뭐 하러 찾아오는지

주인이 이리 오래 누워 있는데.

 

假我活七十, 所有卄三在. 回思數十年, 宛轉如數載. 去去作羈旅, 歸家恒饑뇌.

粗讀古人書, 未足驚四海. 宿昔甘澹泊, 常恐此身渙. 逢人無所辭, 敢言思도彩.

今日維病臥, 窓월頗爽塏. 淸風拂庭樹, 薔薇吐芳뢰. 俯身寫吾詩, 仰看白雲改.

性本不嗜酒, 意到引壺乃. 癡男雖不讀, 稚女能섭애, 客來欲何爲, 主人久已悔.        p. 120

 

유금(柳琴, 1741-1788)은 조선 후기 사람이다. 이른바 연암 일파라고 하는 무리 가운데 한 명으로 서얼이다. 기하학을 좋아해 자신이 거처하는 방을 기하실이라 불렀고, 해금과 거문고를 잘 타 이름을 금으로 정했다. 가뭄이 한창일 때 왕명을 받아 저지대의 물을 고지대로 끌어올리는 용미차를 제작하는 등 재주가 남달랐다. 평생 병과 가난, 박대에 시달렸으나 그 세상과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따사롭고 어질어 그의 시에서는 재주를 갖고도 쓰이지 못한 울분 대신 쓸쓸한 아름다움이 빛난다. 말똥구슬[양환]은 스스로 자신의 시집에 지어붙인 이름으로 연암이 "말똥구리는 제가 굴리는 말똥을 사랑하므로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고, 용 또한 자기에게 여의주가 있다 하여 말똥구리를 비웃지 않는 법"이라고 한 말에서 취했다. 연암의 서문만 전하던 차에 유금의 후손에게서 '양환집'을 찾아내어 돌베개 우리 고전 100선 첫 권으로 삼았다고 한다.

 

아내에게

 

옛날의 여군자(女君子)를 어긴 적 없건만

지금의 내 아내는 몸이 아파라.

한집에서 서로서로 병 걱정하고

8년을 가난하게 함께 살았네.

양홍(梁鴻) 처는 가시나무로 비녀를 삼고

극결(극缺) 처는 손님 대하듯 밥을 올렸지.

부녀의 도리 잘 따르는 이는

자손이 번성하는 복 누리고말고.

 

無違古女子, 有疾今夫人. 一室相憐病. 八年共食貧.

梁妻荊作飾, 극婦?如賓. 坤道順承者, 종斯乃可詵.                 p. 35

 

젖은 손이 애처로운 아내에게 바치는 시다. 아름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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