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뜬금없이 옛날옛날에 보았던 '데미지'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났다. 아들의 연인과 사랑에 빠진 것도 모자라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아버지 스티븐 플레밍으로 분한 제레미 아이언스가 추리닝 바지에 슬리퍼 끌고 슈퍼에라도 다녀오는지 식료품 봉지를 든 채 좁고 지저분한 골목을 느릿느릿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아들의 죽음 이후 세세한 뒷이야기 없이 바로 이어진 장면이었다. -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 모르긴 해도 아들의 죽음 앞에 진상을 알게 된 아내는 그에게 저주와 증오를 퍼붓고 떠났을 것이고, 엄청난 스캔들은 직장도, 사회적 명성도, 이웃도, 친구도, 재산도 다 앗아갔을 것이다. 그와 함께 죄를 지은 연인은 죄책감 때문이든지, 아니면 감정의 장난으로 그의 곁을 일찌감치 떠났을지도 모르고, 그녀는 남고 싶었더라도 그가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일찌감치 사회복지연금 대상자가 되어 나라가 제공하는 작은 집에서 빠듯한 연금으로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죽지 않았으니 살아갈 뿐인 그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죽을 때까지 그런 삶이 이어졌겠지. 그런데도 왜 그는 당장 죽지 않았을까. 그의 삶의 자랑이었던 것, 기쁨이었던 것, 행복이었던 것들을 모두 잃었는데도. 어쩌면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더 힘들었을 텐데도.
'타인의 삶'을 보고 나오면서 그 장면이 떠오른 건, 이 영화의 두 주인공 가운데 하나인 비즐러가 우편물 가방을 끌고 느릿느릿 걸어가는 마지막 장면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보다 사람이 가진 어떤 것 가운데는 그 하나를 뺀 나머지 다와 맞바꿔도 아깝지 않을 만한 것이 있어서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독일의 신예 감독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의 '타인의 삶'은 독일 통일 전의 동독의 한 비밀경찰(슈타지)의 이야기다. 냉철하고 고지식한 비밀경찰 비즐러는 우연히 보게 된 연극 무대에서 그 연극의 대본을 쓴 작가 드라이만과 연극의 주인공이자 드라이만의 연인인 크리스타를 보고 그들의 감시를 자청한다. 드라이만이 외출한 틈을 타 집안에는 도청장치가 설치되고 그의 삶은 낱낱이 기록되고 감시당하기 시작한다. 아니, 비즐러에게 감상당하기 시작한다. 드라이만의 사랑과 우정, 예술, 소소한 일상까지. 비교적 온건한 성향의 그는 스승이자 자신의 연극의 연출가였던 알버트가 무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에 절망한 나머지 자살을 하자 동독 정부가 자살률에 대해 함구하는 것에 대한 비판의 글을 싣기로 한다. 드라이만의 삶을 지켜보며 어느새 그에게 인간적 이해의 감정을 품게 된 비즐러는 과연 이 사실을 상부에 알릴 것인가, 아니면 그걸 감추고 모든 것을 잃는 자멸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도무지 화를 내는 법도, 웃는 법도 없이 매일매일 똑같은 일상을 치러내는 - 정말 그런 느낌이었다 - 비즐러가 드라이만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눈물을 흘릴 때,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사랑과 믿음을 듣고 보고 지켜주고는 집으로 달려가 매춘부를 부르고 그녀에게 잠시만 더 머물러 달라고 청할 때, 드라이만의 브레히트 시집을 훔쳐다가 소파에 누워 읽고 있을 때, 그가 우편물 감시원이 되어 다른 이들과 일렬로 구부정하게 앉아 봉해진 우편봉투에 김을 쐬어 봉투를 뜯고 있을 때, 나는 울었다. 그가 너무 외로운 것 같아서. 그가 자신의 집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난 아이에게 "공의 이름이 무엇이니?" 하고 물었을 때, 나는 울었다. 그는 누군가를 알기 위해서 이름을 물을 수조차 없는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 누가,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그가 감시했던 드라이만 책의 헌사 페이지를 펼칠 때, 또 울었다. 그가 너무 행복할 것 같아서. 그가 자기 삶과 맞바꿔버린 그것이 너무 귀하고 간절해서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 그것을 보답받아서도 아니요, 누가 큰 소리로 그의 행동을 알려서도 아니었다. 그는 그것으로 족했던 것이다. 그것 하나를 뺀 나머지 자신의 삶과 맞바꾼 단 한 가지 그것으로 인해 그의 삶은, 그 자신에게 충만하고 떳떳하고 아름다운 완벽한 삶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나머지는 모두 덤일 뿐이다. 죄책감조차도. 초라하게 계속 살아간다는 것이 그 죄책감을 더는 일일까. 모르겠다.
그가 다 잃고도 죽지 않고 또 슬퍼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남은 삶을 채워갈 수 있는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인간이 고귀해질 수 있다면, 그들이 자기 삶과 맞바꿀 수 있는 그것 하나를 가지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 그 때문이리라. 그 하나가 '데미지'에서처럼 비극으로 끝난 사랑이라 할지라도.(도덕적인 판단은 유보하기로 하자, 영화 속에서 가장 죄없고 순수한 이 하나가 죽는다는 것도 비슷하다)아니, 이 여자는 보는 영화마다 강추인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타인의 삶', 가능하다면 꼭 보시기 바란다. 전세계에 단 하나뿐인 분단국가 국민으로서도 꼭 보아야할 영화고, 성공한 삶이 아니라 고귀한 삶을 보고 싶은 분이라면 내려가기 전에 꼭 보시기 바란다. 시어머님과 시어머님의 올케 두 분이 며칠 손님으로 묵어가셨는데, 토요일 아침 밥을 차려드리고 애들 오기 전에 돌아오려고 조조 9시 30분 영화를 보았다. 젊은이들 몇 명과 나, 관객은 스무 명도 안되어 보였다. 그런데, 난 아직 눈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한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친구로 보이는 아가씨들에게 다가가 "누가 이 영화 보자고 했어?" 그러고 따지는데, 좀 안타깝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고.. 그나저나 감독에게 이게 첫 영화라는데, 73년생이란다. ㅠ_ㅠ 나는 그동안 무얼 했나. 뭘 하긴, 애 둘 낳아서 10살, 9살로 키우기가 쉬운 줄 아나, 하고 위로를 해본다.
* 읽어볼 만한 감독 인터뷰가 있어 링크한다. 특히 80년대 동독 지식인에 대한 부분. 보실 분은 보시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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