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중영화는 인물의 전형성과 결말에 대한 안심, 그런 것들을 확실히 보장할 때 성공적인 영화가 된다 *
드디어 타짜를 봤다. 18세 이상 관람가 영화 가운데서는 아마 최고 관객수를 기록하지 않았겠냐는 소문이 있다던데, 그럴 법하다. 상영시간이 140분, 무려 2시간 20분인데,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원작에서 덕 본 게 많긴 하겠지만, 인물이며 사건, 관계, 사람의 감정을 밀고 당기는 이야기를 그렇게 짜임새있게 보여주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공장에 다니던 평범한 시골 청년 고니는 인생, 악셀 한번 밟아보고 싶다면서 노름판에 뛰어든다. 근성과 재능을 갖춘 그는 평(청?)경장이라는 스승을 만나 노름 고수, 타짜의 세계로 들어선다. 스승의 갑작스런 의문의 죽음, 노름판을 설계하는 욕망의 화신 정마담, 노름판을 드나드는 다양한 사람들, 서로를 도와주기도 하고 서로의 등에 칼을 겨누기도 하는 동료 타짜들, 운명의 대결을 펼칠 수밖에 없는 상대 타짜 아귀, 사나이 순정을 울려주는 어여쁘고 참한 아가씨까지. 인물들의 관계를 타고 사건의 흐름은 파도를 탄다. 최고로 잔인하고 최고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적수 타짜와의 마지막 대결! 이 장면을 절정의 축으로 방사상으로 펼쳐졌던 이야기들은 마무리된다. 누가 스승을 죽였을까. 누가 이길까. 과연 복수에 성공할 수 있을까. 이런 흥미로운 결과를 향해 벌여놓았던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정리, 수렴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 어찌 재미있지 않겠나.
이 영화의 매력은 그 딱 떨어지는 서사에 있지만, 더 중요한 건 그 서사는 보여주는 방식이다. 최동훈 감독은 이미 '범죄의 재구성'이라는 전작에서도 구성의 묘미를 보여준 바 있다. 이번 영화는 전작보다 훨씬 복잡해졌는데, 가령 고니-청경장에서 정마담으로 주요 인물의 범위가 넓어지고, 거기서 다시 고니-고선생으로 가지를 치고, 고선생과 고니가 곽철용을 만나고, 그 사이에 두 여자가 끼고, 곽철용은 최종 종착지인 아귀로 건너가는 다리 역할을 한다. 아귀로 가기 전에 긴장감을 덜어줄 가벼운 인물로 몇몇 희생자가 끼고, 그 희생자들이 사방에 놓인 징검다리가 되어 가운데 있는 결론으로 갈등과 감정이 모여든다. 그 징검다리는 목적지로 가면서 점점더 좁아지고 그렇게 대미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이런 구성을 그냥 시간 순서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시간 중간을 무지른 뒤, 거기서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이러는데, 마치 마구 뒤집히고 흩어져있는 퍼즐조각들을 하나하나 확인해 전체적인 그림을 맞춰가는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면서 몇 가지를 생각했는데, 하나는 영화의 캐릭터가 전형적일수록 영화는 재미있어진다는 것, 복선이라고 깔아놓은 것들이 너무 나 복선이에요, 하고 있어서 내가 이런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 뭐든 새로운 것은 영화를 세련되게 만든다는 것, 세 가지.
고니도 그렇고, 친구로 나오는 고광렬도 그렇고, 김혜수가 연기한 정마담도 그렇고, 악당으로 나온 곽철용이나 아귀, 스승으로 나온 청경장도 캐릭터가 굉장히 전형적이다. 그런데, 전형적인 캐릭터들이 어떤 역할을 할지 너무 잘 아니까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불편하지가 않고 참 매끄럽다. 김혜수 나오는 영화가 나올 때마다 내가 괜히 긴장되곤 했는데, - 왜 도대체 이 배우는 어떤 역할을 해도 달라보이지 않을까 - 이 영화의 감독, 그 전형적인 인물과 김혜수가 가진 미덕들을 연결짓다니, 김혜수의 성취보다 그게 더 탁월해 보인다. 기름칠한 것처럼 매끈한 김혜수의 몇몇 대사들이 귀에 쟁쟁 울린다. 다음, 영화 곳곳에 나름 복선, 혹은 반전이라고 숨겨둔 것들이 너무 눈에 띈다. 청경장의 시신을 보던 고니가 잘린 팔을 확인할 때, 이미 머잖아 그것이 복선이 되겠구나 싶었고, 고니가 아귀가 청경장을 죽인 것이라고 단정 짓고 복수의 칼날을 번뜩일 때 칼날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건 나만 그랬나. 새롭지 않은 캐릭터를 가지고도 지루하지 않은 영화를 만든 건 무엇보다 앞에서 말한 새로운 구성이다. 구성이 새로우니 영화 전체가 아주 세련되게 느껴졌는데, 이런 기술적인 것에 많은 관객들이 호응한 것을 보니, 이제 한국 관객의 수준도 장난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하하, 중간에 허영만 선생님께서 도박꾼으로 나오시더군. 여전히 멋지시더군. 크. 조승우는 걱정했는데, 카리스마 삘이 나오더군. 이런 영화를 좋아하냐고 물으면, 물론 좋지. 재밌잖아? 이런 답이 준비되어 있는데, 사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여러 생각이 든다. 영화든 책이든 비현실적일 정도로 영웅적인 인물이 중심이 되면 처음부터 안심이 되는 느낌이라서 좋긴 한데, 다 보고 나서는 좀 허탈하다. 하지만 이런 영화야말로 그런 안심 - 주인공은 죽지 않아, 조금이라도 착한 사람이 이겨 류의 - 을 얻기 위해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영화에 업계 용어가 많이 나와서 반은 이해 못했다, 이런 얘길 많이 들었는데 난 왜 그런 걸 못 느꼈지? 혹시 꾼 기질이 있는가. ^^ 타짜 만화가 '섰다' 뿐 아니라 포커 등등 몇 편으로 이어져서 속편을 만든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속편은 완전히 다른 감독, 다른 배우로 만들 거라는데, 어떻게 될까 궁금하다. 같은 이야기를 가지고도 작가에 따라, 감독에 따라 완전히 다른 영화나 책이 만들어지는 걸 보면, 확실히 재능이라는 게 있긴 있나 보다. 기술과 공부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그런 생각을 하면 괜히 암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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