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너지는 삶, 그들을 잇는 위태로운 외줄 위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
한 영화주간지를 읽다가 머릿속 생각이 뚝 끊기면서 잠시 아득해졌다. 두 번이나 그랬는데, 하나는 소설가 이기호가 쓴 '내 인생의 영화'를 보다가였고, 또 한 번은 짤막한 기자 칼럼을 읽다가였다. 이기호의 '내 인생의 영화'는 내 인생의 영화이기도 한 '길버트 그레이프' 였다. 그는 조니 뎁이 집과 함께 죽은 어머니를 태우고 동생 어니를 데리고 길을 떠나는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참을 수 없어서 엉엉,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개새끼야, 혼자 가란 말이야!’라고 욕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는 어느 시인의 싯구를 따 ‘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들이,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다 죽는다’고 썼다.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은 다 죽었지만 빛나고 아름다운 그것들을 집에 가져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알기에, 그것이 눈물겨워서 보고 또 보고 울고 또 울었다고.
다른 칼럼에서 영화기자는 소비되기 위해 탄생하는 영화의 현실에 대해 공감하면서도 켄 로치 감독의 영화와 이창동 감독의 말을 빌어 "과연 영화가 관객의 영혼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영화라는 매체가 관객과 소통하면서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인지 궁금해"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두 감독의 근심어린 말에 마음이 쏠리는 건 인간의 존재와 세계를 사유하는 영화가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 아니라, 사유하는 영화와 이런 영화를 ‘재사유’하려는 시각을 비아냥거리고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어떤 영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되든 안 되든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많았는데, 요즘에는 이해가 안 되는 영화는 ‘흥, 저게 뭐야’ 하면서 짓밟으려 한다”는 한 영화 애호가의 말에 나 또한 절대 공감한다"고 썼다.
길버트 그레이프를 보고 울었던 그때, 이해할 수 없는 영화를 이해하려고 애쓰던 그때. 그때의 내가 떠올라서였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를 심각한 얼굴로 보러 다닌 때였다. 아마도 10년 전쯤. 그때 폐허가 된 네모난 분수(?) 안을 촛불을 든 채 한없이 느리게 걸어가다가 촛불이 꺼지면 다시 처음부터 걸어가던 타르코프스키의 주인공을 이해하려고 졸린 눈을 부릅떴었다. 모든 영화평론가들이 앞다퉈 상찬을 바치던 그 영화가 난 왜 재미없을까 속으로 끙끙 앓으면서도 그 속에 삶의 의미와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가 담겨있을 거야, 뇌를 고문했었다. 그러니까 나는 "되든 안 되든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이었다. 지아장커의 영화 '스틸 라이프'를 보면서 다시 그때를 생각했다. 아, 순서가 바뀌었던 거로구나. 영화를 이해하면 삶이 보이는 게 아니라 삶을 맛보면 영화를 알게 되는 것이로구나.
샨밍과 셴홍은 각각 16년 동안 못 만난 아내를 찾아나선 남자와 2년 동안 연락이 안 되는 남편을 찾아나선 여자다. 이들이 찾은 샨샤는 샨샤댐으로 점차 수몰되어 가고 있었다. 건물마다 수위가 표시되고 그곳은 곧 부서졌다. 아내를 찾으러 온 샨샤는 철거 노동자로 일하며 아내를 찾는다. 그곳에는 한물 지난 홍콩영화를 흉내내며 살아가는 청년과 사고로 팔을 잃거나 팔이 부러진 노동자, 아줌마들을 데리고 아가씨 장사를 하는 여자, 내일 모레면 무너질 집을 웰세 놓아 먹고 사는 할아버지, 짐과 사람을 수몰된 지역에 데려다 주고 셋집을 소개해주며 살아가는 오토바이 몰이꾼, 배를 타고 도착하는 외지인의 주머니를 터는 가짜 마술사들이 살아간다. 그 한편으로는 외제차가 지나가고, 새로 만들어진 거대한 다리에 휘황한 불이 켜진다.
샨밍이 이곳에 와서 만난 것은 담배를 피우며 유행가를 흥얼거리는 소년, 아내의 존재에 대해 입 다무는 처삼촌, 멋진 인생을 꿈꾸는 자칭 암흑가 청년이다. 셴홍이 만나는 것은 열쇠로도 열 수 없어 망치로 부수어야 하는 캐비넷 속에 담겨있는 남편의 오래된 물건들, 석양의 쌍쌍파티와 매끈한 호텔이다. 모든 뒷모습은 어쩐지 가슴을 저리게 하지만 그게 사라져 가는 것들임에랴. 장면들을 나눈 것들이 담배, 술, 차, 사탕이었다. 중국에서는 이 네 가지를 있으면 가정이 행복하다는 말이 전한단다.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호의를 표시하기 위해 건네지는 담배는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청년의 향불로 대신 태워지고, 토끼모양 사탕은 죽으러 가는 사람에게서 산 사람에게 건네지고 다시 기다리는 사람에게 나눠진다. 누군가의 뒤에서 낡은 건물은 로켓처럼 날아가지만 누군가의 뒤에선 거대한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무너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위로 흐르는 건 삶이다. 16년 동안 소식조차 모르던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광부의 삶을 택하는 그나 2년 동안 끊어졌던 삶을 이혼으로 끝내고 새로 건설되는 도시 상하이로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그녀의 삶은 계속된다. 거기에 무엇이 있나. 아무것도 없다. 정물화 같은 삶이 그들 뒤 외줄 위에서 위태롭게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내가 참 좋아하던 책 '리버타운'에는 변화하는 중국의 스산한 분위기를 단 한 줄로 "이 웅장한 묘에는 어린 옥수수가 유일한 제물이고, 대나무 줄기 사이로 삐걱대며 지나는 알 수 없는 바람소리만이 유일한 기도이다"라고 전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을 가진 중국, 2천년의 삶의 지층도 지속되는 삶 속에 점점 더 아래로 침식될 뿐이다. 그 세월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처럼 이따금씩 돌아보며 10년전의 내게 그러듯 그때 빛나던 것들은 내 삶 속에서 시들었다고만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위에서도 우리 모두의 삶은 스틸 라이프. 영화든 삶이든 의미 따윈 없을지라도, 우리도, 그들도 이미 스틸 라이프.
'영화를 보러갔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디악 - 그를 둘러싼 사람들 (0) | 2007.09.02 |
---|---|
두번째 사랑 - 날 좀 봐요 (0) | 2007.06.26 |
밀양 - 살려달라고 손을 내밀라 (0) | 2007.05.28 |
타인의 삶 - 삶과 바꿀 수 있는 것 (0) | 2007.04.09 |
타짜 - 대중영화로 사는 법 (0) | 2007.0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