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러갔다

두번째 사랑 - 날 좀 봐요

양화 2007. 6. 26. 23:56

 

"날 봐요, 내 옆에 누가 있는지 보지 말고."

 

내 이럴 줄 알았다. 영화의 시놉시스가 뿌려지고 예고편이 돌고 스틸 사진이 떠돌 때부터 이 영화를 대놓고 좋다고 말하긴 좀 그런 영화, 중산층 여자의 배부른 일탈 쯤으로 치부하며 여성 관객이나 평론가들조차 데면데면할 줄. 몇몇 여성평론가의 호의적인 평이 잇따랐지만 공감없는 외침은 공허할 뿐이다. 여성, 아니 여성의 몸, 아니 욕망에 대해 다룬 영화들의 운명이 그랬듯이 말이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은 허탈해하며, 자신이 본 영화 가운데 가장 허무한 마지막 장면을 운운하기도 했다. 영화의 주인공 소피는, 마지막 장면에서 문득 관객을 바라보며 생긋 웃는다. 마치, "날 봐요. 내 옆에 누가 있는지 보지 말고." 라고 내게 말을 건네는 듯 했다.

 

소피는 변호사로 성공한 한인 2세와 결혼해 뉴욕의 심장부에서 안락한, 아니, 그렇게 보이는 가정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해가는  백인 여성이다. 하지만 안정되어 보이는 그 가정이 흔들린지는 이미 오래. 표면적인 이유는 아이가 없다는 것이지만 불안은 거기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아버지가 죽은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이 자살을 시도하자 그녀는 시도해서는 안될 일을 결행한다. 한번에 3백 달러씩, 그녀가 임신을 하면 3만 달러를 현금으로 지불하기로 하고 남편과 닮은 한국인 남자와 거래를 한다. 처음엔 치욕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묘한 감정에 사로잡히는 그들. 소피는 드디어 임신에 성공하고 이제 모든 것은 제자리에, 찾지 못하던 퍼즐 한조각을 끼워맞춰 완성된 평화로운 그림 속 여인으로 살아갈 일만 남았다. 그런데, 이 마음은 뭘까.

 

이 영화의 첫 시작은 교회 목사님이 한국어로 주도하시는 장례식으로부터 시작된다. "김집사님은 앤드류 리의 아버지로, 이현자 권사의 남편으로, 뉴욕 한인사회의 기둥으로 ..." 불과 몇 달 경험으로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내가 본 바로 미국 한인사회에서 한인교회가 갖는 위상은 좀 독특하다. 한인교회는 한인커뮤니티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인맥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것과 동시에 개개인에게는 아주 한국적인 자기 과시의 무대가 된다. 이들은 미국 주류사회에 배타적이면서도 그 사회에서 성공한 한인들을 중심으로 결속한다. 한 교회의 인맥은 그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집안을 중심으로 꾸려지고 비슷한 영향력을 가진 집안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알력이 늘 존재한다. 그 알력이 긴장을 이기지 못한 채 끊어져 버리면 그것만으로 교회 자체가 사라지거나 생기거나 한다.

 

한인사회의 계급적 지형도를 한눈에 보여주는 한인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전시다. 미국 주류사회에서 성공을 거머쥔 앤드류의 집안은 모르긴 해도 이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핵심일 것이며 그 안에서 백인 며느리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일 거다. 아름다운 얼굴과 태도를 가진 이 백인여성은 미국 주류사회에 성공적으로 편입한 이 가정의 가장 중요한 증거임과 동시에 결벽하리만치 피의 순수성을 따지는 한국 전통가족의 모욕일 것이다. 종교는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진행되는 예배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소피가 갖고 있을 마음의 그늘이 충분히 짐작된다. 게다가 푸른 눈의 금발머리 백인여자라는 걸 빼고는 별로 계급적으로도 나을 게 없다. 여기에 40일 동안 단식기도를 한 끝에 아들 하나를 낳아 금이야 옥이야 키워낸, 며느리가 한 음식이 형편없다고 다 쏟아버리고 다시 처음부터 해버리는 완벽주의자 시어머니라니.

 

소피가 이 가족 안에서 안정적인 자리를 얻는 방법은 유일해 보인다. 그것은 대를 이을 아이, 정확히 말하면 아들을 낳는 것이다. 소피는 최소한 남편과 자신의 아이라고 믿을 수 있는 아이를 얻기 위해 한인사회의 말석에도 앉지 못하는 불법체류자 한국인 남성을 선택한다. 이 관계에서 우위는 소피에게 있다. 소피는 이 남자의 이름과 직업, 신분적 상태, 국적, 결혼 여부, 심지어 혈액형까지 알고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이름조차 모른 채 시작한다. 그런데, 이 남자, 몸을 팔고 사는 그런 상황에서도 따뜻하다. 샤워하는 체, 그녀가 가길 기다렸다가 슬그머니 나오고, 아프냐고 물으며 아픔을 덜어주고 싶어 한다. 벌거벗은 채 잠든 여자의 몸에 이불을 덮어주고 평화로운 잠이 되길 바래준다. 고향에서조차 외로웠다던 남자, 그래서 사랑하는 여자와 다른 곳에서 더 나은 삶을, 소박한 행복을 찾으려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이 남자.

 

처음에 소피는 돈을 지불하는 것을 잊는다. 두 번째로는 서로의 상처를 할퀴다가 어루만진다. 그는 그녀에게 그녀가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위해 원하는 것이 없느냐고 묻는다. 머뭇거리는 그녀에게 남편이 가르쳐주길 거부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돌을 쌓고, 마음으로 원하고, 그 돌무더기를  지나칠 때마다 마음으로 빌었던 것을 기억하고. 서로의 상처를 보아버린 두 남녀는 예전에 그들이 아니다. 시선조차 못 마주치고, 그 부분 외에 다른 부분을 닿기도 꺼려하던 둘은 어깨 너머로 시선을 나누며 마침내 마주치며 서로의 몸 너머로 진심을 나누기 시작한다. 오, 그러나 이를 어째, 소피는 임신을 하고 그 둘은 다시는 만나서는 안되는 사이가 된다. 한인 교회 목사님의 주도로 - 처음으로 영어로 예배를 드린다 - 임신 축하 파티를 하던 순간, 문득 그녀는 살그머니 왔다가 사라진 그 남자의 자리를 느끼며 그 사람이 와주길 바라고 있다.

 

화면도 너무 곱고, 음악도 너무 좋고, 패기 넘치는 영화학도의 첫 영화답게 구성요소 하나하나가 공들여 만져져있다. 물론 그래서 보이는 소박함도. 하지만 그런 섬세함이 좋다. 첫 관계 후 비누로 몸을 박박 씻어내던 장면과 마음을 나눈 후 샤워하면서 자기 몸에 키스하며 어루만지던 장면. 붉은 포도주가 들어있던 깨진 잔과 흔들리긴 하지만 맑고 투명한 술이 담긴 잔. 비가 내리는 장면, 같은 비를 다른 곳에서 맞고 있던 두 사람. 정확하게 댓구를 이루는 이런 장면들이나 여성적 욕망의 과일인 복숭아가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 푸른 눈에 어울리는 사파이어 보석반지 대신 낡은 침대보를 대신할 푸른색 침대 시트와 복숭아색 커튼을 선택하는 센스는 여성감독이 아니라면 잡아낼 수 없는 섬세함이다. 그 남자를 기다리며 그 푸른 시트에 앉아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리는 커튼을 바라보던 장면은 완벽한 평온, 이라는 말을 생각하면 언제나 떠오를 것 같다.

 

전말을 알게 된 남편, 이제 봉합하기에는 늦어버린 균열의 확인. 뱃속의 아이가 남편의 아이임을, 자신이 남편없이는 살 수 없을 정도로 남편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확인받고 싶어했던 그녀는 짜던 털실 옷을 풀어버리고, 남편을 위해 혼전 임신을 혼자 처리하게 했던 그녀에게 위로나 미안함 대신 싸늘함을 던졌던 남편에게 이 아이가 자기 아이임을 선포하고 집을 나와 그 남자의 기원의 장소를 찾아 무언가를 기도한다. 그리고는 한참이 지난 후에 저렇게 바라보며, 날 봐요 하듯 우리를 쳐다 본다. 물론 남편의 입장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사실 이 남자도 불쌍하다. 소피는 왜 그 남자를 사랑하는지 한번도 이야기하지 않지만 아마도 연민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온전히 소피에게 감정 이입했다. 김진아 감독은 전작에서도 계속 여성의 몸을 천착했다고 한다. 거식증을 치유해가는 '비디오 일기', 임신과 낙태, 다른 남자에 대한 욕망을 그렸다는 '그 집 앞', 단 두 편으로 할리우드의 총아가 된 그녀의 영화에는 자신이 고민했던 것,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을 정성들여 보여주려는 진심이 보인다.

 

다른 사람은 물을지 모른다. 왜 하필 몸인가. 여성의 욕망이 그 한가지는 아닐 텐데.. 하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내가 아는 어떤 여성도 자기 몸을 사랑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마도 그게 여성 감독이 여자의 다른 욕망이 아니라 몸을 다룬 이유일 것이다. 나는 물론이거니와 내가 보기엔 자만심을 가져도 될 만큼 아름다운 얼굴과 몸을 가진 여자들조차도 그들은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경우는 드물다. 꽤 컸는데도 어느날 문득 아이들이 집에서 벗고 있어도 그걸 내가 큰일날 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들 스스로도 그렇게 느낀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여자아이라도 그랬을까. 자신의 정체성의 최초의 육화인 몸을 자랑스러워하는 경험, 그게 있는 것하고 없는 것하고 많이 다를 거 같다. 그러니까 이건 사회적인 문제다. 여자들은 어렸을 때부터 몸을 드러내는 것은 부끄러운 것, 꼭꼭 감춰야 하는 것이라고 교육받고 조금더 큰 다음에는 가슴이 나오거나 몸이 변하는 것을 창피한 것으로 인식한다. 부모 성교육 과정에서도 남자들의 성욕은 건강하고 당연한 것이어서 애들 방에 크리넥스 티슈를 준비해주는 걸 센스로 가르치지만 여자에 대해서는 아이를 갖는 소중한 몸이니 잘 간수해야 한다고만 강조한다. 

 

감독이 이 영화의 미학적 고려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 장면에 역설을 두겠다는 것이었다는데, 그 가운데는 초기의 임신하기 위한 섹스와 이해와 즐거움이 있는 섹스 사이에 어떤 것이 더 아름답고 설득력 있나 하고 묻는 역설도 포함되는 듯하다. 계급이나 인종, 세상엔 거대하고 거창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사실 여성의 지위는 인종이나 계급, 혹은 지역을 막론하고 어디나 비슷하다는 게 내 생각이지만서도) 그에 비해 여성의 몸에 대한 이야기는 어쩐지 한가하고 사소하게 들릴지 모른다. 낭만적 사랑으로 갈무리하는 결론에 대해 못마땅할지도.(낭만적 사랑, 자기 희생과 배려, 여성에게 세상이 가르친 게 이것 뿐인데, 어쩌겠는가..) 그러라지, 뭐. 김진아 감독 말대로 '위대한 것은 그들(남자들)의 것'이니까. 하지만 누군가 이런 영화를 좀 계속 만들어줬으면 싶다. 그리고 사람들이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김진아 감독은 아마도 계속 이런 영화를 만들 것 같다. 그녀는 여성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영화는 호러하고 멜로인 것 같다고, 여자가 무서운 일을 겪으면 호러가 되고, 슬픈 일을 겪으면 멜로가 되는 거라고. 그래서 다음 영화는 평범한 가정주부가 옆집에 섹시하고 예쁜 여자가 이사오면서 두 여자의 정체성이 서서히 뒤바뀌어가는 사이코 스릴러가 될 거란다. 기대된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감독의 팬이 된 것은 물론이고, 베라 파미가와 하정우의 팬도 되었다. 하정우란 이 배우는 많지 않은 나이에도 겉멋이 없는 것 같아 믿음이 간다. 블루 칼라 역할을 해도 잘 어울릴 만큼 너무 미끈하지 않은 것도. 베라 파미가는 어찌나 아름답던지. 특히 사려깊게 깜빡이며 온갖 감정을 이야기하는 그 두 눈과 가느다란 팔과 상체.. 가만 보면 은근히 강해보이는 구석도 있어서 킬러나 스파이 이런 것도 잘 어울릴 것 같다. 영화잡지의 기사에서 이 영화에서 처음의 의례적인 베드신의 체위는 정상위인데, 정서적 교감을 나눈 후에는 모두 좌위가 아니면 입위라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얘길 하는 걸 봤다. 그래서 혼자 생각해봤는데, 아마 좌위와 입위는 여성의 능동성이 좀더 강조되는 데다 임산부의 안전한 성생활을 위해 추천되는 체위라 그런 게 아닌가 생각해 봤다. 하하, 이런 18금 포스팅을.. ^^; 어쨌든 여자들이 이 영화 좀 많이 보고 자기 몸과 욕망 - 이게 꼭 한 가지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자기 긍정의 원동력으로서의 욕망 - 을 긍정하고 사랑하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