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 지음/문이당/252면/문이당
이 책이 처음 나온 해는 1992년이었습니다. 대학생이 된지 얼마 안 된 저는 소설이
보여주는 세상 속에 푹 빠져있었고, 이 책은 당시 문청이라면 누구나 필독하던 책이었죠. 한 소설가의 삶을 추적하는 '나'라는 소설가의 액자소설로
구성된 이 책은 소설가가 쓴 소설과 그의 이야기, 그에 대한 나의 해석 등이 얽히면서 허구와 진실이 뒤섞이며 우리 모두의 삶의 비밀이 한 꺼풀씩
벗겨집니다.
비극의 시작은 언제나 금기를 깨는 데서 시작하지요. 감나무 근처에는 가지 말라던 어른들의 명을 어기자 액자 속 소설가
박부길은 운명의 소용돌이에 한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집안의 기대를 진 채 선택한 삶이 아니라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죠. 어지러워진 삶에서 그는 구원의 빛을 찾아헤맵니다. 그것은 잃어버렸던 어머니, 나이 많은 여자와의 사랑에서 신에 대한 간구, 문학에의
지향으로 나아갑니다.
문학은 그에게 구원이 되었을까요? 그때는 그렇게 믿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자아의 방에 스스로를 가둔 그의 선택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믿었지요. 좁고 어두운 그 방에서만 평화롭고,
자유로웠던 그의 선택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직은 어린 때였죠. '나'라는 또다른 작가가 주인공 박부길의 소설과 그의 삶에 달고 있는 주석들도
흥미로웠습니다. 삶은, 본래 어두운 것이라고 믿던 때였지요.
그로부터 어느새 15년. 다시 읽은 책 속에서 "어느 날부터인가
박부길은 어둠이 뿜어내는 빛 아래 웅크리고 앉아 충동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가슴을 답답하게 가로막고 있는 그 무겁고 큰 덩어리를
어떻게든 떨어내고자 하는 욕망 때문인지 그의 글은 속도가 몹시 빨랐다" 는 문장을 보고, 그의 선택은 어둠 속의 수인(囚人)이 아니라 거기서
벗어나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뒤늦은 깨달음이 들었습니다. 그 소설의 제목은 다름 아닌 '지상의 양식'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