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러갔다

베테랑 - 작은 안도

양화 2015. 9. 14. 14:21

 

 

요즘 마음이 많이 무거웠다. 그 중에서도 제자가 단지 비호감이라는 이유로 온갖 모욕과 학대, 폭행을 일삼은 교수 사건과 9년 간의 법정 투쟁 끝에 원심 파기 환송을 선고 받은 직후 세 살 짜리 아이를 남기고 자살해버린 KTX 여직원의 일은 특히 내 마음을 꽤 오랫동안 괴롭혔다. 문명이라는 건 도대체 뭔가,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그러나, 인간은 도대체 어디까지 괴물이 될 수 있나. 나 혼자서는 해결할 수도 없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공연히 서글퍼지다가 가끔은 대상도 없이 화가 났다.


그 와중에 1년도 더 전에 촬영이 끝났다는 소문을 들은 영화 ‘베테랑’ 시사회가 열렸다. 날은 덥고 하고 있던 일은 지지부진했고 개인적인 고민으로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먼 길을 나섰다. 영화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는 상태였다. 배우 황정민과 유아인이 투톱이라는 것, 1억 배우 오달수와 유해진이 가세한다는 것, 재미와 흥을 버무린 액션을 사랑하는 류승완이 감독이라는 것, 정도가 알고 간 것의 전부였다. 첫 장면부터 주변의 지형 지물을 활용하는 류승완 감독의 장기 ‘생활 액션’이 힘 안 준 유머와 함께 빵빵 터졌다.


영화가 끝나고 마음 한 켠 후련함을 안고 나오면서 생각했다.(아트박스 사장님이 한 방 왜 안 날려주셨을까, 기대했건만.. 그런 생각도 했지만) 이 후련함은 뭐지? 모르긴 해도 조태오와 그 기업이 저지른 더 큰 악이 있을 텐데, 눈에 보이지 않고 피해자를 어떤 한 개인으로 특정할 수 없어 그 피해 규모조차 짐작할 수 없는 구조적인 악이 있을 텐데,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까지 그는 벌 받지 않을 텐데, 정경유착, 밀실야합, 그런 세상, ‘부당거래’ 같은 세상이 있고 그건 서도철이 어떻게 못할 텐데 말이다.


조태오 같은 비현실적이고 불쾌한 악한이 등장하는 경찰영화들의 계보가 있어 왔다. 지금 생각나는 건 ‘공공의 적’과 ‘와일드카드’. 그런데 그 영화들을 보고 나오면서 알 수 없는 찜찜함 같은 것이 남았었다. 같은 인간으로 감정이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악한이란 찜찜함을 남기는 법이다. ‘와일드카드’ 같은 경우는 그 범죄자가 범죄자에 관한 온갖 편견으로 만들어진 사람이어서 그랬던 거 같고, ‘공공의 적’은 일종의 사이코패스여서 그랬다. 본질은 같았다.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가끔은 현실이 상상을 초월할 때가 있다. ‘인분교수’부터 IS까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너무 많이 보았다. 어느 순간, 나는 그들이 한 짓은 그저 법이라는, 오랜 세월 인류가 만들어온 문명으로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할 나쁜 짓인데, 그걸 왜 내가 이토록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나, 싶어졌다. 범죄를 저지른 자가 개인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었든, 그걸 왜 우리가 기를 쓰고 이해해줘야 하나 싶어졌다. 그건 다른 영역의 일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나는 조태오처럼 구조적으로 힘센 '갑'이 정당한 벌을 받을 거라고 생각할 만큼 순진하지는 않다. 영화를 본 누구라도 그러하리라. 내가 느낀 후련함은 적어도 그가 대로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벌인 일에 대해서만큼은 죗값을 피할 수 없을 거라는 작은 안도에서 왔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안도에서 뭐든 시작할 수 있을 테니 힘을 내보자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세상이 그렇지, 뭐 하는 체념이 지겨웠던 것 같다. 누군가 작은 힘을 낸다면 응원하고 힘을 보태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서도철이 신진그룹 빌딩 앞에서 건물을 올려다 보는 장면을 앙각으로 잡은 장면은 거대한 존재와의 결전을 앞둔 작은 존재의 상투적 표현이지만 그 각도가 점점 내려와 서도철과 빌딩이 마침내 수평을 이루고, 배기사가 투신한 바닥에서 위를 올려다보던 서도철이 계단을 하나씩 올라와 중간에까지 이르는 장면(그가 계단을 끝까지 올라오는지 꽤 신경써서 보았는데 분명 중간에서 힘들다면서 멈췄다),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싸움에 나서는 동료를 돕는 동료애 같은 것이 그런 작은 움직임의 징표 아니겠나 믿고 싶었다.


그 일을 다른 누구도 아닌 배우 황정민이 앞장 서서 해주어 기뻤고, 1천만 가까운 관객들이 관람으로 힘을 보태 또한 즐거웠다. 근데, 지난번 영화 ‘베를린’에서도 그랬는데,(배우 하정우랑 한석규가 옥상에서 싸울 때) 소화전처럼 불쑥 튀어나온 쇠뭉치에 등 같은 데 세게 부딪히거나 열린 차문 가장자리에 부딪히는 등의 액션은 류승완 감독님 취향인 건지, 아님 정두홍 무술감독님 취향인 건지...(배우 황정민님에게 물어본 결과, 감독님 취향이라고 합니다) 너무 아플 거 같아서 보기에도 괴롭다. 칼이나 총 쓰는 것보다 몸을 쓰는 액션을 선호해서라는 건 알겠는데, 하여간 그렇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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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회에서 한 번 보고, 가족들과 함께 한 번을 더 보았다. 관객 700만이 넘은 시점에서 배우 황정민은 조촐한 팬들 모임에 깜짝 방문해주었고, 관객이 좋아해주는 영화라서 기쁘다, 라는 것 외에 다른 것으로 들뜨지 않은 채 다음 영화를 향해 묵묵히 한 걸음씩 내딛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유아인도 좋았고 무엇보다 모처럼 출연 영화가 흥행한 것에 대해 무구하게 신나 있는 게 보기 좋다. 유아인의 또 다른 개봉작 '사도'도 잘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팬인 배우가 꾸준히 작품을 하고 있는 터라 매년 한두 편씩 즐거운 마음으로 작품을 기다리는 것도 삶의 작은 기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