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러갔다

환상의 그대 - 이생에서 희망을 버릴 것

양화 2011. 2. 12. 15:38

 

 

철딱서니 없는 노인네를 연기한 안소니 홉킨스는 너무 귀엽고, 헬레나 역의 젬마 존스 너무 우아하다. 약간 피곤하고 히스테리컬해 보이는 나오미 와츠 연기도 일품이고, 적당히 통속적이고 느믈거리는 아저씨 역할의 조쉬 브롤린도 멋지다. 그 단추 어긋나게 채우는 장면 좀 보라지.. 그리고 프리아 틴토, 너무 아름다워요!!

 

이 영화의 원제는 You will meet a tall dark stranger다. 이 말의 의미는 영화 속에서 나오는데, 점쟁이들이 흔히 하는 말로 남쪽에서 귀인이 나타날 거다, 뭐 그런 뜻이다. 우리가 점을 보러 갈 때의 상황이 흔히 그렇듯 이 말은 삶이  막다른 골목에 부딪힌 것 같이 막막하고 답답할 때 우리를 구원해주는 한 줄기 빛 같은 말이다. 어느 날, 느닷없이 귀인이 나타나 나를 이런 상황에서 구해줄 거라는 기대는 생각만으로도 얼마나 달콤한가. 영화는 헬레나라는 중년 부인이 크리스탈이라는 점성술사를 찾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우아하고 곱게 늙은 중년의 모습과는 달리 헬레나(이름조차 헬레나!)는 불안정해보인다. 40년 넘게 사랑하고 믿고 의지해왔던 남편에게 어느 날 갑자기 이혼을 당한 후 헬레나(젬마 존스)는 수면제를 과다 복용했고, 그후 우울증과 신경불안 때문에 의사의 상담을 받아왔다. 보다 못한 딸이 일종의 심리테라피스트랄 수 있는 '사기꾼' 점성술사를 소개해준 것이다.

 

헬레나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전망없는 작가와 결혼한 후 생활고를 겪는 헬레나의 딸 샐리(나오미 왓츠), 데뷔작 이후 경력이 신통치 않은 작가 사위 로이(조쉬 브롤린), 아내와 이혼한 후 제2의 청춘을 불사르고 싶어하는 헬레나의 남편 알피(안소니 홉킨스), 샐리가 취직한 갤러리의 대표로 여자 헷갈리게 하는 데 선수인 (안토니오 반데라스), 샐리의 앞집에 이사온, 누군가의 뮤즈를 꿈꾸는 인도계 여성 디아(프리아 핀토)의 이야기들이 이리저리 얼킨다. 그들은 모두 저마다 막막하고 답답한 현실 앞에 서 있다. 이들은 모두 어디선가 tall dark stranger가 나타나주길 바라고 있다. 알피는 친구에게 소개받은 젊은 콜걸이, 샐리는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취직한 갤러리 대표가, 로이는 건너편 방에 이사온 이국적인 미녀 디아가 기다리고 있던 바로 그일 거라 생각한다.

 

그게 잘 안 풀려가리라는 것은 뻔하다. 영화를 시작할 때, 이미 해설자는 "인생은 분노와 헛소리로 가득차 있다. 인생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경고를 해두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아가기 위해 때로 환상이 필요한 거라고. 영화는 헬레나가 '환상의 그대'로 추정되는(?) 대머리 남자와 함께 전생 이야기를 하면서 끝난다. 환상 속에서 헬레나는 이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은 이 영화가 환상 덕에 무의미하고 남루한 인생이 풍요로워지고 살 만해진다, 뭐 그런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느꼈지만 나는 반대였다. 이 삶에서 환상이라든가, 희망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만이 행복해지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시니컬함이라니! 우디 앨런, 멋쟁이 늙은이 같으니라구!
 
헬레나가 행복해보이는 건 다른 사람들의 환상이 모두 깨져버렸음에도, 그녀가 여전히 환상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이생에서 희망을 완전히 버렸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더 나은 내일이 아니다. 알피가 다 늦은 나이에 아들을 얻어 함께 축구를 하며 젊은이처럼 살고 있을 내일을 꿈꾸는 한, 샐리가 능력있고 섹시한 남자가 나타나 5만 파운드짜리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선물하고 오페라에 데려갈 날을 꿈꾸는 한, 로이가 젊고 아름다운 뮤즈가 영감을 불어넣어 최고의 걸작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어느 날을 꿈꾸는 한 그들은 영영 행복해질 수 없다. 내일이 더 나을 거라는 희망도 없이 어떻게 살 수 있느냐고? 내일은 오늘없이 오지 않는다. 헛소리와 분노로 가득찬 오늘을 희망 따위 품지 말고 그저 살길. 온전히. 영화는 내게 그렇게 속삭였다.


그리고 잊혀지지 않던 한 장면. 로이가 샐리와 이혼한 후 디아의 방으로 들어온 날. 로이는 짐을 풀다가 문득 예전에 샐리와 살았던 집 창문을 건너다 본다.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샐리가 옷 벗는 걸 바라보던 로이의 얼굴에 잠깐 동안 머문 표정은 회한이 아니었다. 그건 처음 디아를 훔쳐볼 때 표정과 같았다. 환상에는 거리가 필요하다, 아니, 거리가 환상을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오늘의 삶에서 절대 떨어지지 말 것. 거리가 생기는 순간, 환상의 덫에 사로잡힌다. 그동안 우디 앨런 영화를 특별히 눈여겨본 적이 없었는데, - 그냥 늘 시끄럽다고 생각했다 - 새삼 반했다. 짧지만 꽉 찬 영화, '우만모', '우디 앨런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모임'을 하나 더 결성해야 하나? 눈썹과 입이 동시에 처진 이 시니컬한 노인네는 갈 때가 된 자신을 붙드는 걸 좋아하지 않을 거 같긴 하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