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몸과 얼굴은, 설사 그가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안하고 있을지라도 일차적으로 그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 몸과 얼굴로 다른 사람의 삶과 감정을 표현해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고 나아가 관객을 설득해야 하는 배우들에게 몸이란, 자연인으로서의 배우 자신과 캐릭터를 근원적으로 연결해주는 첫 번째 고리다. 때때로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배우들은 그들이 육화한 캐릭터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밖으로 끌고 나가버리지만 역시 아름답지 않은 배우란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원하는 무언가 - 환상이라고도, 꿈이라고도 할 수 있는 - 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멜로의 주인공은 그가 비록 창백한 불치병 환자의 몰골이어야 할지라도, 아니, 그 창백함 때문에, 그 비극적 환상 때문에 더 아름다와야 한다. 배우 황정민의 오랜 팬임을 대내외적으로 떠들어온지도 어언 8년. 영화가 개봉될 때마다 팬의 의무와 권리로 일착 관객이 되어 왔는데, 먼 이국땅으로 떠나온 한 해 반 동안 일착 관객이 되지 못했다. 띄엄띄엄 들려오는 소식과 새로 개봉한 영화 소식, 평론가들의 들려주는 영화의 성취에 대해서나 주워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부당거래'가 개봉된 후, 평단과 관객의 만장일치 호평이 잇따랐다. 센세이셔널한 등장에 비해 한 방이 없었던 류승완 감독에 대한 상찬이 이어졌고 이제 그도 흥행감독의 반열에 올라섰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늦은 밤, 그런 소식을 씨네21 웹사이트로 들여다보다가 문득 한 장의 스틸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찾으려니 잘 찾아지지 않아, 그게 꿈결에 본 것인가, 한밤중 모니터 불빛에 홀린 것인가 생각했다. 그 스틸 사진에서 황토색 가죽점퍼를 입은 배우 황정민이 구부정한 자세로 서 있는 모습이었다. 오랫동안 제대로 된 배우를 꿈꿔왔던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는 어떻게 연기해야하는지 잘 훈련한 사람이다. 어깨가 좁아보이고, 비율상 매우 긴 다리지만 안으로 약간 휜 다리는 듣기로 황배우의 오랜 컴플렉스라고 했다. 몸과 목소리를 어떻게 써야 효과적인지 잘 아는 그지만, 애초에 생겨먹은 몸을 바꾸지는 못할 터. 그 사진은 그의 몸의 단점이 극단적으로 부각된 사진이었지만, 아니 그래서 더욱 그 사진 한 장으로 나는 아직 보지도 않은 영화에서 배우 황정민 역할이 보여줄 절망과 좌절이 느껴져 잠깐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런 와중에 들려온 소식. 시애틀에서도 한국의 화제작을 틀어주곤 하는 앨더우드 AMC 독립영화관에서 '부당거래'를 상영한단다. 고작해야 2주 정도 상영하기 때문에 서둘러야 할 것 같아 개봉한 다음 날 영화관을 찾았다. 관객은 달랑 7명. 영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 슬그머니 들어온 2명의 미국인 관객 - 미국 멀티플렉스에서는 일단 표를 끊으면 좌석이 지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안에서 하루 종일 왔다갔다 하며 온갖 영화를 다 봐도 된다 - 까지 하면 모두 9명. 한가운데 중간쯤의 명당 자리에 앉아 관람을 시작했다. 시작 시간을 10분 이상 넘겨 들어갔지만 - 정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고속도로를 헤치느라 제 시간을 대지 못했다, 팬이 뭐길래.. 그 빗속을.. ㅜ_ㅜ - 영화 광고를 어찌나 많이 하는지, 영화 첫 장면부터 하나도 잘라먹지 않고 볼 수 있었다. 영화 속의 황정민은 스틸 사진을 보고 들었던 예감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마음이 아팠다.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부당한 거래, 라는 커다란 틀보다 그 안에서 가족을 지켜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고단함(여기에는 부양의 책임도 포함되지만 이 사람이 나의 누구라고 뻐길 수 있어야 한다는 명예의 책임도 들어 있다)과 그 길이 아닌 줄 잘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한 작은 선택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 발 한 발 불운한 운명으로 그를 끌고 가는 연약하고 힘없는 개인으로서의 그에게 더 마음이 쓰였다. 누구든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면, 그건 배우 황정민이 연기한 그 남자, 최철기가 남 같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이 영화 속에서 황정민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대사 하나하나를 보자면 세지만 어쩐지 안은 텅 비어 있는 듯 공허하기만 한 말들이었다. 세야만 하니까 척이라도 해야 해서, 그래서 내뱉는 말 같았다. 최철기의 대사 중 심지가 박혀 있는, 정말 센 대사는 죽어가는 후배를 붙들고 니가 왜 여기 왔냐고, 안된다고 외치는 그 대사 뿐이었다. 배우는 대사를 공허하게 하는 한편 몸으로 모든 장면에서 말을 한다. 커넥션에 동참하는 대가로 승진을 약속하는 경찰 관료를 보내고 난 후, 생각에 잠겨 있던 그. 통화기록을 박박 찢던 공중전화 박스 속의 그. 검사 앞에서 옷을 벗던 그. 온국민의 관심사였던 연쇄강간살해범을 체포해 호송하는 그. 그때마다 자신없는 듯 움츠린 그의 몸은 그가 입으로 하고 있는 말과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의 불완전한 몸은 어느 영화에서나 배역의 일부로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서울로 떠나기 직전 텅빈 무대에서 드럼을 쓰다듬을 때, 위에서 떨어지는 조명은 그가 쓰다듬던 드럼을 반짝이게 하는 대신 그의 얼굴과 구부정한 어깨에 깊은 그늘을 드리웠다. '로드무비'에서 정찬이 전 아내를 만나러 갔을 때, 화장실에서 자기 얼굴을 거울로 들여다 보던 장면에서도 그는 움츠린 어깨로 자신을 경멸하듯 노려봤다.
그뿐인가. '행복'에서는 거울 속 그 얼굴에 침까지 뱉었다. 다리가 긴 그가 쭈그리고 앉으면 효과는 더 극대화된다. 그의 몸은 더 작아지고, 마치 자궁 속의 태아처럼 둥글어진다. '행복'의 목욕탕 씬에서도, '부당거래'에서 탈의한 상태로 무릎 꿇는 장면에서도 그의 몸은 곧장 세상으로 내뻗을 수 없는, 자신없고 무언가 모자란 캐릭터를 보여준다. '바람난 가족'에서 그의 움츠러든 몸이 부각되는 건, 다른 장면에서가 아니라 법정에서 그럴싸한 말을 하던 대목에서였다. 이런 역설이 그가 맡았던 배역들에 입체감을 주었다고 하면 이건 편향된 시각을 가진 팬의 오독일까. 오히려 그의 몸이 역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캐릭터의 외부적 현현으로 나타난 것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맹인 검객뿐이었다. 지팡이를 짚고 더듬어온 수십 년의 삶이 그냥 몸으로 체화된 것일 뿐, 그의 몸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의 몸은 결정적인 순간에 캐릭터의 어떤 결핍을 보여주는 데 쓰였지만 왜 유독 '부당거래'를 보는 동안 그것이 더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일까. 그건 이전의 배역들이 내지르던 타입이었다면 최철기는 그렇지 않은 배역이어서였을 것이다. 나는 그가 하는 대사 대신 그의 몸을 볼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의 몸은 대사와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몸이 하고 있는 말이 더 절절했으니까. 나는 배우가 아름답지 않은 것은 직무유기일지 모른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배우 황정민은 자기 몸이 가진 콤플렉스까지 배역의 일부로 쓸 줄 아는 배우다. 이 정도라면 이건 영리한 걸까, 잔인한 걸까. 그리고 그저 눈 감고 싶은 배우의 콤플렉스를 낱낱이 쓰고 있는 나는 팬일까, 팬을 가장한 안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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