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러갔다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 삶은 부서지기 쉬운 것

양화 2009. 12. 18. 10:48

 

 

매스미디어 개론 시간에 시드니 루멧의 '네트워크'를 보고 시드니 루멧이 좋아져서 그의 다른 영화들을 찾아보았다. 여든을 넘긴 이 노장이 만든 영화 가운데는 영화광들이 '내 인생의 영화'로 꼽는 작품이 여럿인데,

그 가운데서 내가 가장 소문을 많이 들은 건. '허공에의 질주'다. 그래서 일단 '허공에의 질주'를 구해놓고 최신작이라는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를 구해두었다. 뭘 먼저 볼까 하다가 최신작을 먼저 보게 되었는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영화는 이런 문구로 시작된다. "May you be in heaven. Half an hour before the devil knows you're dead".  아일랜드의 속담이라는데, 말할 것도 없이 제목은 여기서 따온 거다. 찾아보니, 이렇게 'may'로 시작되는 말은 속담(proverb)하고는 달리 무언가를 기원해주는 말, 축복해주는 말로 proverb이 아니라 blessing으로 일컬어진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전문을 찾아보니 이 말 앞에는 이런 말이 생략되어 있다. May your glass be ever full, May the roof over your head be always strong... 제대로 해석한다면,  may는 '-하기를' 정도로 번역이 되겠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 난 이 말이 '-일지도 모른다'로 느껴졌다. 약간 비아냥기를 담아 "네 잔이 가득할지도 모르지, 네 머리 위 지붕이 튼튼할지도 몰라, 그리고 한 30분 정도는 천국에 머물 수도 있을 거야, 악마가 네 죽음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야..." 이렇게..

 

이렇게 으시시한, 묵시록적인 제목을 단 영화가 편안할 리 없다. 앤디는 번듯한 부동산 회사에서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일하는 미국 중산층이다. 중년임에도 젊고 아름다운 아내와 아직 열정적인 잠자리를 가질 만큼 모든 게 완벽해보인다. 약간의 불안이라면, 그는 아내와 이끄는 대로 떠나고 싶어한다. 브라질의 리오로.. 그토록 완벽한데, 그는 왜 떠나려 하는가. 그의 동생 행크는 이혼 후 하나밖에 없는 딸애의 양육비를 대지 못해 전전긍긍이다. 어느날 형은 동생 행크를 호출한다. 그리고는 뜻밖의 제안을 한다. 네 경제적 곤궁을 해결해줄 일을 하나 벌이자는 거다. 동생은 의아하다. "형이 왜?" 일단 유보적인 답을 건넸지만 오래 갈 리 없다. 딸애의 수학여행비가 절박해진 행크는 형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형은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강도짓이라며, 부모님의 보석가게를 털 것을 제안한다. 둘의 계획은 완벽하다. 둘은 어릴 때, 부모님의 가게에서 일을 거들었기 때문에 그곳 구조를 잘 알고, 강도를 하는 날은 부모님이 오지 않고 일하는 사람이 대신 오는 날이고, 모든 보석은 보험에 들어 있기 때문에 설사 털린다 해도 손해는 보지 않는다. 경찰도 진짜 총과 구별해내기 어려운 요즘 장난감 총으로 위협을 하면, 주인도 아닌 종업원은 쉽게 보석과 현금을 내놓을 거고, 그 값어치는 60만 달러, 장물이라 제값을 못 받는다고 예상하고 10%만 잡아도 6만 달러.. 누구도 다치지 않은 채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는 완벽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용기도, 자신도 없었던 행크는 양심의 가책없이 나쁜 짓을 하곤 하던 친구 하나를 끌어들였다. 그 단 한 가지를 바꿨을 뿐인데, 또 우연이라는 운명의 장난이 가게를 지키는 사람을 바꾸었을 뿐인데, 모든 것이 망가졌다. 장난감 총을 대신한 진짜 총 때문에 엄마와 친구가 죽고, 도망가고 싶어했던 앤디의 비밀도 드러난다. 삶은 부서지기 쉬운 것.. 사람들은 그걸 자주 잊는다. 우리 삶에 아무 문제가 없을 때, 삶은 견고한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이 아무 문제없이 흘러가고 내가 쌓는 대로 만들어진다. 그렇지만 단 하나가 어긋나는 순간, 방심하는 짧은 순간이 일으킨 작은 균열은 삶을 남김없이 부숴버린다. 그러니 잠시라도 삶에서 눈을 떼었다가는 큰 코 다친다. 영화를 보고 나니, 오싹해졌다. 심지어 죽음 후에까지 악마는 우리가 우리 삶에서 한눈 파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어두운 영화를 특별히 좋아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희망을 남기는 영화보다 완벽하게 절망적인 영화가 삶의 어떤 진실을 전해준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다는 건, 이 영화를 보면서 확실해졌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면 한 며칠은 너무너무 우울해 견딜 수 없어 하면서도 그런 영화에서 눈을 돌릴 수가 없다. 다음은 '허공에의 질주'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