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차 2000일, 세월호 200일. 야만의 시절이다. 더 나빠질 수 있을까 싶지만, 암울하게도 더 나빠질 수도 있겠다 싶다. 진짜 걱정스러운 것은 사람들이 모두 홀로가 되어가고 있다는 거다. 사람들은 사람들 속에서 황현산 선생님 말마따나 "인간 본성이 요구하는 모든 미덕에 열린 사람"이 될 수 있다. 5년에 걸친 쌍용자동차의 투쟁이 그것을 말해준다. 책을 읽다 보면 때때로 코끝이 시큰해진다. 그들의 바람이 너무 작고 소박해서, 이런 것마저 이룰 수 없는 사회가 과연 사회일까 싶어서. 도서관에서 빌려 보았지만 반드시 동네 서점에 가서 100% 제값을 주고 살 생각이다. 당신들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러니 혼자 죽지 말라는 뜻을 담아.
어느새 지난해 일이 되었다. 지난 해 6월 7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은 시민들의 후원을 받아 중고 쌍용자동차 한 대를 해체한 후 2만개의 부품을 모아 다시 조립해 차 한 대를 완성했다. 현장을 떠나온지 4년이 넘었음에도 공구를 들자마자 손의 감각은 온전히 돌아왔고, 신명나게 차 한 대를 모두 조립한 해고 노동자는 뒷풀이 자리에 앉아 계속 중얼거렸다. "또 하고 싶다" 도장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 김대용은 거리에 돌아다니는 쌍용차만 봐도 몇 년도 산인지, 도장한 달이 여름인지 가을인지 단박에 알 수 있다고 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데도 생계활동을 포기하고 대한문 앞에서, 때로는 고압 송전탑 위에서 싸우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리라는 인간이 어떻게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는지, 이 세상이 누구 덕으로 조금씩이라도 좋아져왔는지, 어떻게 해야 지금보다 더 따뜻한 세상이 될 수 있을지 깨닫게 된다. 우리들이 그들 곁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더 이상 아무도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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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슬픔과 기쁨, 정혜윤 지음, 후마니타스
복기성은 서른 일곱에 송전탑에 올라갔다.
그냥 올라가게 되었어요. 주어진 상황이 힘들어서 매일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부당하게 해고돼서 5년 이상 싸우는 과정에서 말도 안되는 일을 겪는 내 상황에 대한 억울함, 분노도 있고 세상 떠나는 사람들도 있고... 가족과 함께 일상을 보내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모든 상황이 힘들었어요. 이런 생활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싶고. 그렇지만 억울함이나 분노를 포기하고 딴 데 갈 수도 없었고요. 누리고 싶은 일상을 살아보는 것. 이게 공동 과제 아닌가 싶어요. 해고자들이 공장으로 돌아가고, 가족들과 자기 삶을 되찾고, 주말에 놀기도 하고 저녁엔 가족과가이 밥을 먹기도 하고, 회사에서 돈 벌어서 기본적인 생활을 하고... 여기 올라와서 물꼬를 트고 싶었어요. 공장에서 우리를 볼 수 있는 곳에 있고 싶었어요. 눈뜨면 공장이 보여요. 그럼 빨리 돌아가고 싶고. 철탑 위 조그만 천막 밖에 나오면 매일 보이는 게 굴뚝이에요. 내가 일했던 조립 공장, 도장 공장, 프레스 공장 정경이 보여요. '빨리 저기 가야 하는데...' 그 생각이 들어요. 여기저기 점점이 흩어져 있는 사람들이 공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간절함 때문에 그냥 올라왔어요. 167-168
2013년 5월 9일 복기성, 한상균이 건강상태 악화로 내려왔다. 171일만이다. 복기성은 울음을 터뜨렸다.
허리는 조금씩은 안 좋았는데 나중엔 계속 좁은 공간에서 누워서 생활했어요. 통증이 많이 왔죠. 내려오는 과정에서 안 좋았어요. 한상균 동지는 혼자라도 있겠다고 했는데 혼자는 못 내려가겠더라구요. 혼자서는 하면 안 돼요. 고공 농성은 혼자 하면 안 되는 거예요. 많은 생각들을 하잖아요. 조건들이 위험한 상황이에요. 절대로 고공 농성은 혼자서는 안 돼요.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요. 죽으러 올라간 게 아니고 살려고 올라갔잖아요. 살아야겠다. 우리도 살아야겠다. 이제 아무도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202-203
진짜 힐링은요, 일을 하고 정기적으로 돈을 벌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세계랑 계속 연결돼 있는 게 힐링이더라구요. 파업 때는 미안해서 있었는데 지금은 내 의지예요. 제선이 말대로 새로운 인간이 탄생한 거예요. 예전엔 즐기고 돈에 여유 있고 한 게 사람답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사람답게 사는 것은나라는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찾아가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예전엔 '좋은 게 좋은 거지. 내가 참고 지나가면 되는 거지.'하고 생각했어요. '그런갑다.' 이러고 살았죠. 배워서 뭐가 제일 달라졌냐면, 배워서 분노하게 되었어요. "분노해서 뭐할 건데?" 이럴 수도 있겠죠. 앞으로도 싸우고 살 건지 말 건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가치관이 내 삶의 한 방식, 한 부분을 크게 차지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269 (염진영)
하루하루 노동자답게 산다는 것은 고단한 일입니다. 제일 힘든 것은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걸 보면 저도 힘듭니다. 노동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다면 그렇게 살고 싶고, 또 한편으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해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서 마을 이장을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제 생각에 저는 참 잘할 것 같아요. 왜냐면 우리는 그 옥쇄 파업 과정에서 스스로를 통제하고 다독거리고 위로해 주는 법을 배웠던 것 같아요. 지금도 우리 선도투 동지들이 공장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하는 것 못 봤어요.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배웠던 것 같습니다. 내 신념으로 혼자 깨우친 게 아니라 사람들을 통해서 배웠어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 주위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마음을 모으면 가고자 하는길이 바로 이 안에 있다.' 최근에 독일에 다녀왔는데 어떤 노부인이, 자기 남편이 벤츠 자동차 회사에서 일하다가 정년퇴직했는데 아들이 그곳에 다시 들어가 일하게 되었다며 굉장히 자랑스러워하는 걸 봤습니다. 그걸 보면서 '나도 정년 퇴직할 때까지 일하고 싶다. 그 속에서 노동자하는 이름을 자랑스럽게 자식에게 남겨줄 수 있도록 해보겠다.'는 생각을 다시 굳혔어요. 묵묵히 자기 일, 자기 역할을 하하고 자기 삶을 살고 사랑한 사람으로 기억에 남고 싶습니다. 273-274 (김정욱)
그래도 저는 지금은요, 옛날에 일하던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요. 희망퇴직 한 사람들이 더 보고 싶어요. 잘 있는지, 잘 살아 있는지 확인하고도 싶고. 어쩌면 가장 우리를 위해서 선택한 사람들일 수도 있어요. '내가 나가면 너희들이 남을 수도 있지 않느냐.' 이런 생각들이 있었어요. 조합 지침으로 따지면 이탈한 건데, 다른 면으로 보면 우리를위한 가장 큰 희생자가 아닌가 싶기도 해요. '내가 죽을 테니 니가 살아라.' 동료들을 위한 이런 마음이 있었는데 노조가 지켜주지 못했어요. 만일 내가 지부장이라고 하면 나는 편지를 쓸 거예요. 희망퇴직자들에게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희망퇴직자들을 배신자라고 할수 있을까요?) 왜 이런 생각을 하냐면, 희망퇴직자들이 많이 죽었어요. 희망퇴직자 수가 많기는 많지만 대책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에요. 우리, 싸운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개인적으로만 싸우지 않잖아요. 희망퇴직자들은 혼자 맞서는 거예요. 각각 맞서다 보니 바람에 넘어지고 있지 않나 싶고, 우린 같이 있다 보니까 바람에 덜 넘어지는 것 같고. 희망퇴직자들을 비난하기에는 우리 책임이 적지 않아요. 희망퇴직 한 사람 때문에 운 적도 있는데... 제가 풍기 출신이라서 고향 친구가 회사에 없는데 유일하게 고향 형이 있었어요. 형의 동생도 다녔어요. 둘 다 희망퇴직 했죠. 파업 전에 형한테 전화가 왔었어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형이 왜 그만둬? 둘 중 하나는 살아야지." 형이 알았다고 하고 파업 첫날 들어왔다가바로 나갔어요. 무력하더라구요. 노조가 못 지켜 주는구나. 말로는 이길 수 있다고 했는데... 278-279 (한상균)
내가 봤을 때, 대한문에 있던 시간은 우리 동료들의 인간미가 유감없이 발휘된 시간같아요. 같이 싸우고 밤 지새우고 비 맞고 눈 맞고. 저는 사람들 등을 되게 오래 본 것 같아요. 그게 되게 좋았어요. 대한문에 있으면서 한참 동안, 10분 동안 밖만 보는 모습이라든지, 대화의 느낌보다는 그런 모습이 많이 남고, 그런 모습이 많이 믿음직하다가도 서늘하다가도 미안하고. 저는 이상하게 나이 든 형들에게 미안하데요. 나도 어린 사람은 아닌데 형들에게 미안하더라고요. 과한 오지랖이라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지만 어떤 형들을 보면서는, 측은하고 미안한 생각인데, '빨리 정리하고 다른 삶을 살아도 될 텐데...' 그런 생각도 했어요.
저는 이렇게 하는 이유가, 조명이 꺼지지 않아서에요. 그 빛이 밖에서 오는지 안에서 오는지 모르겠어요. 빛이 안 꺼져서 해요. 빛이 꺼지면 저도 어딘가 도망가겠지만 빛이 안 꺼져서 도망 못 가요. 280-281 (한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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