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위화의 중국

양화 2013. 7. 16. 22:34

 

한 사람이 성장해온 과정이 그의 일생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가장 기본적인 그림이 바로 이때 그의 가슴 깊은 곳에 새겨져 마치 복사기처럼 한 장 또 한 장 개인의 성장에 계속 복사되는 것이다. 그가 자라 성인이 된 뒤 성공한 사람이 되었건 실패한 사람이 되었건, 위대한 사람이 되었건 평범한 사람이 되었건, 그가 행하는 모든 것들은 이 가장 기본적인 그림을 부분적으로 수정한 데 지나지 않는다. 당연히 그림 전체는 변하지 않는다. 148

 

사실 삶과 글쓰기는 아주 간단할 때가 있다. 어떤 꿈 하나가 어떤 기억 하나를 되돌리면,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이 변하고 마는 것이다. 157

 

나의 성장과정에서 혁명과 가난을 빼면 남는 것이라고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논쟁뿐이었다. 논쟁은 내 유년 시절과 소년 시절의 사치품이었고 가난한 생활 속의 정신적 양식이었다. 167

 

나는 매번 위대한 작품을 읽을 때마다 그 작품을 따라 어디론가 갔다. 겁 많은 아이처럼 조심스럽게 그 작품의 옷깃을 붙잡고 그 발걸음을 흉내내면서 시간의 긴 강물 속을 천천히 걸어갔다. 아주 따스하고 만감이 교차하는 여정이었다. 위대한 작품들은 나를 어느 정도 이끌어준 다음, 나로 하여금 혼자 걸어가게 했다. 제자리로 돌아오고 나서야 나는 그 작품들이 이미 영원히 나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04

 

이는 내 유년 시절의 지난 기억이다. 성장하는 과정에는 때로는 잊기 힘든 일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삶 속에서 나는 사람들을 전율시키는 이 아름다운 유년의 경험을 완전히 잊고 말았다. 무더운 여름날 오후, 나는 죽음을 상징하는 영안실 시멘트 침대 위에 누워 인간 세상의 시원한 숨결을 마음껏 느꼈던 것이다.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날, 나는 우연히 '죽음은 서늘한 밤이다'라는 하이네의 시구를 읽게 되었다.

그러자 오래 전에 사라졌던 유년의 기억이 내 전율하는 마음 속에서 순간적으로 되살아났다. 방금 목욕을 한 것처럼 맑고 뚜렷했다. 그리고 다시는 이 기억이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만일 문학에 정말로 신비한 힘이 존재한다면, 나는 아마도 이런 것이 그 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108  

 

인생은 종종 이렇다. 때로는 단점에서 출발한 것이 갈수록 장점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장점에서 출발한 것이 갈수록 단점이 되기도 한다. 136

 

나중에 젊은이들이 종종 내게 묻곤 했다. "어떻게 해서 유명한 작가가 될 수 있었나요?"

나의 대답은 하나이다. 바로 '글쓰기' 덕분이었다. 글쓰기는 경험과 같다. 혼자서 뭔가 경험하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을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직접 써보지 않으면 자신이 무엇을 쓸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137

 

-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문학동네

 

너무 오래 전에 읽은 책이라 이제 가물가물하다. 임시저장의 글들이 하도 많이 쌓여있어, 일단 밑줄긋기부터 처리. 위화의 책을 읽으면서 이놈의 문화혁명, 하다 생각했다. 역사의 어떤 국면이 해결되지 않고 넘어가면 그것이 해결될 때까지 끝까지 따라다니는구나.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에 아직도 우리는 위안부 이야기를 해야 하고 들어야 하고, 일본제국주의의 잔재가 청산되지 않았기에 아직도 우리는 그 이야기를 해야 하고 들어야 한다. 어처구니없게도 방송에서 대놓고 북괴간첩이 준동했다고 몰염치하게 떠드는 5.18도 마찬가지고, 박정희 독재 정권도 마찬가지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리고 기억이 희미해질수록 절실함 대신 피로가 쌓인다. 팩트조차 제대로 모르니, 해석도, 평가도 불가능하다. 그러니 빨리 해결하는 게 상책.

 

위화의 이 책에는 중국의 역사 이야기가 많아 상대적으로 책임감도 덜 느껴지고 공감도 덜 되었지만 위화가 소설가로써의 자신이나 유년 시절을 이야기할 때는 참 좋았다. 특히 내가 마지막에 인용에 놓은 문장 좋지 않은가. 어떤 것에 대입해도 딱 떨어지는 문장이 될 듯 하다. 특히, "혼자서 뭔가 경험하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을 경험할 수 없다"는 말을 얹으면 뒤에 글쓰기 외에 어떤 말을 붙여도 인생의 진리로 작용할 듯하다. 문학의 힘 이야기를 하면서 꺼낸 유년의 이야기도 참 좋지 않은가. 설명하지 말고, 그리라는 말은 나도 자주 하는 말인데, 문학의 힘을 촉각으로, 시각으로 잡힐 듯 그린 것이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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