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은 초월이고 사랑은 지상으로 내려오는 길이다. 매혹은 환상을 창조하지만 사랑은 현실을 받아들인다. 매혹은 중독이고 사랑은 헌신이다. 매혹은 합일을 갈망하지만 사랑은 분리를 귀중히 여긴다. 매혹은 책임감을 회피하지만 사랑은 진심을 다하여 그것을 받아들인다. 매혹은 노력이 필요없지만 사랑은 힘든 작업이다.(288) 또 사랑의 최종적이고 확정적인 단계란 없다. 행복이 그렇듯이 사랑은 계속 진행되는 과정이며, 일종의 끝나지 않는 연합 창조력 프로젝트 비슷한 것이다. 또 행복처럼 성취를 위한 노력 그 자체가 성취가 된다. 창조적 노력이라면 모두 그렇듯이 사랑은 탈진과 쇄신의 순환을 따른다. 쇄신의 기쁨을 맛보려면 탈진은 꼭 필요하다. 그 프로젝트에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어떤 기술이든 가치 있는 것을 제대로 배우는 데는 평생이 걸린다. 사랑도 예외는 아니다.(290) - 행복할 권리, 마이클 폴리 지음
'행복할 권리', 제목으로만 보자면 한동안 차고 넘쳤던( 과거 시점이 아니라 지금도 그런가?) '긍정의 힘'류의 책 같다. 누구에게나 행복할 권리가 있고, 그 행복은 생각하고 마음으로 부르기만 하면 제깍 우리 앞에 달려온다.. 뭐 이런 주장을 담은 책. 제목 덕에 이 책이 더 잘 팔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원제인 '부조리의 시대'(The Age of Absurdity)가 더 의도에 가까워보인다. 그렇지만 이 제목은 너무 진부하다. 80년대 책 같지 않은가. 출판사 이름이 낯설어서 ISBN의 숫자를 확인해보니 신생출판사의 두 번째 책인가 보다. 내용과 제목과 타겟이 되었을 독자가 살짝살짝씩 빗나간 듯해 아쉽다. 아쉽다는 건, 못했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안타깝다는 뜻이다. 훌륭한 책인데, 이런 어긋남 때문에 제대로 된 독자들을 찾아가지 못할까 봐.
'행복'이라는 말만큼 제대로 쓰이지 못한 말이 있을까. 모두가 좋아하는 말이지만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말이다. 객관화, 계량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부족한 단 하나 때문에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낀다. 그러니, '행복'을 전면에 내세운 이 책이 행복을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저자는 다른 철학자의 말을 빌어 전한다. "행복은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고, 계속 노력하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말한다. "고통스러운 탈진과 즐거운 재생의 순환 외에 지속적인 행복은 없다. 이 순환의 균형을 깨뜨리는 자(탈진 다음에 재생이 아니라 비참한 빈곤과 불행이든, 탈진 대신에 지루함을 느끼게 되는 전혀 힘들지 않은 삶과 엄청난 부이든)... 살아 있다는 데서 오는 기초적인 행복을 망친다."(인간의 조건) 그러므로 행복을 위한 처방 같은 건 있을 수 없다. 처방이 없다는 것이 유일한 처방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것을 유일한 희망의 표지로 남겨놓는다. 행복은 상승나선형이다. 행복해지는 것이 의욕을 고취시키고, 의욕은 또다시 다른 것을 증가시키고... 즉, 어떤 것을 성취했을 때의 고양감이 아니라 앞으로 올 가능성의 전율. 행복은 오로지 그 과정에서 느끼는 부산물일 뿐이다.
현대에 들어 행복이란 말은 더욱 심하게 오염되었다. 표면적으로는 행복이 소비를 통한 소유와 혼동하기 때문이지만 더 큰 문제는 자본주의가 속삭이는 당신들 모두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 그러니 이것을 소유함으로써 행복해지라는 복음 너머에 내팽개쳐두고 온 개인적 책임의 방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가슴을 치는 많은 말들이 나오지만 이 모든 말들은 저자가 주제가 다른 장마다 반복하는 딱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스피노자와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스피노자는 "구원이 별 힘도 안 들이고 언제든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어찌 거의 모든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넘어갈 수 있겠는가? 탁월한 모든 것은 희귀하기 때문에 얻기 힘든 것이다."(p. 38)라고 말했고, 쇼펜하우어는 "우리는 무엇인가를 향해 힘껏 노력할 때 외에는 존재하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버전으로는 존 스튜어트 밀의 말로써 "그들 자신의 행복 이외에 다른 대상에 정신을 집중하는 사람들... 만이 행복하다. ... 그렇게 다른 어떤 것을 목표로 하던 도중에 그들은 행복을 발견한다. ... 행복이 아니라 다른 어떤 목적을 삶의 목표로 설정하는 것만이 행복해지는 유일한 기회다."(p. 14)가 있다.
쇼펜하우어는 일찌감치 삶을 "기대의 끝없는 실망과 갱신 속에서, 또 그런 줄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경향"이라고 정의한 바 있고, 스피노자는 "우리의 본성 자체가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인간본성을 가리키는 데 사용한 라틴어 단어는 '코나투스conatus'는 '매진하기' 또는 '노력하기'라는 뜻이다. "모든 사물은 계속 그 존재로 남아 있기 위해 시도하는 노력은 존재의 실제 본질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귀중한 존재가 되려면 그 노력은 힘들지 않을 수 없다."(p. 38) 그리고 저자는 무엇을 통해 과연 우리가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지 하나하나 뜯어본다.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것은 ' 삶이라는 여행', '개인적 책임감', '홀로 있기' '사유하기', '간접경험으로서의 독서'(문학은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확장되는 비밀 사교 네트워크이다, 215, 아이들처럼 재미를 위해 읽지 말라. 야심가들처럼 지시를 받기 위해 읽지 말라. 그런 것이 아니다. 살기 위해 읽으라. 플로베르) 등이다. 그리고 일과 직업, 사랑, 혹은 나이듦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지 묻고 답한다. 맨 위에 인용한 대목이 바로 '12장 사랑이 우리를 구원해줄까'에 나온 구절이다. 사랑의 본질은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시가 그의 책 '레오파드'에서 일갈한 것처럼 "1년간 타오른 불과 뒤에 남은 30년간의 재"(286)다. 그러니 매혹과 사랑을 구분할 것. 릴케는 말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중대한 과업을 수행하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한다. 그는 혼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성찰하고 생각하고 자신을 추슬러 자립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는 일해야 한다. 뭔가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근본적인 조언이다. 연인으로 성공하려면 혼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p. 291)
책 내내 저자는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행복이 완성된 어떤 상태가 아니라 힘껏 노력하는 과정에서 잠깐잠깐 맛보는 부산물이라는 것. 인간은 그렇지 않은 상태로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분석하려 하면 할수록 저 멀리로 달아나거나 해체되어 버린다는 것. 미래에 있거나 과거에 있는 것. 이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한다. "귀중한 것은 모두 애써 얻어야 한다." (p. 96) "살아남는다는 것은 힘껏 노력하는 것이다."(p. 106) "의미에 대한 탐구 그 자체가 곧 의미라는 것이다. 길이 목적지이고 그것을 찾으러 나서는 원정이 곧 성배이다." (p. 113) "가장 깊은 즐거움은 힘들여 얻어진 것이며 섹스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장 강렬한 경험은 힘든 노고, 고통, 분노, 격동 뒤에 온다."(p. 300) "삶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은 삶의 모든 것에 흥미를 가지는 것이다. (p. 306) "우리는 들판의 백합꽃이 아니라 어려움을 찾아나서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존재로 태어났다." (p. 265) 그러니 행복은 온전히 한 개인의 내면에서 오는 것일 밖에. 그래서 행복을 가져다 주는 매개가 되는 행위들은 자율성과 거리두기를 필수 요소로 한다. 스피노자는 행복의 필수 요소로 자기 존중을 말하는데, 그것은 "... 우리 바깥의 어떤 것으로도 확장되지 않으며, 자신이 완전해진다는 것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자,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를 요구하지 않는 냉철한 자만의 것이다."(에티카, p. 152) 그러니까 "구원은 타인이 아니라 개인 내면에서 온다."(p. 159) 그건 사랑도, 사유도, 나이듦도 마찬가지고, 이 모든 것들에게서 맛볼 수 있는 행복은 찰나적이다."성찰적 사유는 참으로 포착하기도 힘들고 붙잡고 있기도 어려운 것이니 그것을 응용할 생각은 하지도 말라. 그것은 나무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처럼 마음속을 스쳐 지나간다."(p. 102)
현대 사회는 이런 것들이 주는 깊은 감정을 찾기 어렵게 만든다. 그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은 끊임없는 활동과 소비. 일, 그리고 "활동은 불안으로부터 놓여나게 해주기 때문에, 그리고 중요하고 의미 있다는 착각을 주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또 하나의 수단이다."(p. 162) 발터 벤야민이 지적한 대로 근대인들은 "경험을 통해 자기 주위 세계의 데이터를 자기 것으로 흡수할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액면가치만이 유일한 가치이고 표면 아래에 있는 어떤 것에 대한 인식은 더 이상 없다."(p. 181)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선사한 현대 사회의 한 징후를 비판하려 하는 듯하다. 그것의 요체는 삶의 본질은 무의미하다는 것. 그것을 전파하는 몇몇 철학자들에 대한 못마땅함을 이따금씩 드러낸다. 타겟은 전에 나도 소개한 적이 있는 존 그레이. 마이클 폴리는 존 그레이를 의식한 듯 그의 책과 정확히 댓구를 이루도록 책을 마무리했다. 존 그레이는 휴머니즘 역시 종교일 뿐이니 시지프스의 노동 같은 헛된 노력은 그만두라고 했다. 하지만 마이클 폴리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이 흘러가는 지상의 순간들을 자연이 그대가 소비하도록 시켰을 법한 방법으로 소비하라)을 슬며시 인용하며 이렇게 대꾸한다. "그래도 이건 내 바위야!"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는 절대로 의미를 찾지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어야 한다!!" (p. 331)
일찌기 톨스토이는 그의 소설 '가족의 행복'에서 삶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 삶 그 자체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는 평생의 무의미를 겪으며 살아가야 하오. 다른 누군가의 말을 그대로 믿고 따라가도 소용이 없지요."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더라도, 마치 의미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지금을 살아야 한다. 도대체 이렇게 사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나. 나는 왜 이 세상에 왔는가. 해답없는 질문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마다 이 책이 위로가 될 것 같다.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대답을 찾아내는 모든 인지 문제 뒤에는 대답될 수 없는 질문들이 웅크리고 있다. 그런 질문은 완전히 게으르게 보이고 항상 게으른 족속으로 폄훼되어 왔다. 만약 우리가 생각이라 부르는 의미를 향한 욕구를 잃고 대답될 수 없는 질문을 던지기를 멈춘다면 인간은 우리가 예술작품이라 부르는 생각의 산물을 만들어낸 능력뿐만 아니라 질문을 던질 능력도 잃게 된다. 문명이란 그런 질문들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것인데.", 정신의 삶, p. 190 재인용.. 게다가 희망적이게도 이 책에서는 노년에 사람들이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 있다고 말하고 있다.
노년이 되면 사람들은 "세상이 부르는 사이렌의 유혹 소리에 저항하기도 쉬워진다. 다른 사람들과 같아져야 하는 필요도 줄며,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고 내가 그들을 좋아해야 할 필요도 줄어든다. 적응해야 한다는 강요도 적어진다. 노련이 누리는 가장 큰 영광 가운데 하나는 고집 부리기인데, 의식으로 통제되는 범위 내에 머무르고 너무 완고해져 괴팍스러움으로 변하지 않는 한 그래도 된다."(315) 게다가 젊은 시절엔 "그토록 재앙처럼 느껴지던 절박함의 소멸. 죽을 수밖에 없다는 인식은 경험에서 흔히 누락되는 집중성과 강렬성을 제공하는 말년의 또 다른 선물이다."(319) 어떤가. 좀 위로가 되는지. 또 노동에 있어 의미있는 전략으로 이렇게 조언했다. "... 프로젝트에는 글복하지만 프로젝트 팀장에게는 굴복하지 말라. 업무 자체에는 몰입하더라도 업무의 윤리를 받아들이지는 말라.(p.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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