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가던 블로그 주인장이 자기 아는 사람이 이 책을 몇 권이나 사서 지인들에게 신년 선물로 돌렸다는 이야기를 보고 서점에서 보자마자 챙긴 책이 '사회적 원자'(사이언스북스). 책이 말하고 있는 바는 명쾌하다. 세상의 모든 일은 인간 하나하나의 특징을 반영하지 않는다, 오로지 그들이 만드는 패턴을 통해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 뿐, 이라는 것. 이를 일컬어 '사회물리학'이라고 한다. 원자를 연구해 물질의 세계를 탐구하는 물리학처럼 인간을 사회를 이루는 원자로 보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패턴을 통해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다. 사회과학이 한 가지와 다른 한 가지 사이의 상관관계를 탐구하는 데 그치고, 경제학이 원인, 사람, 사람의 동기가 어떤 사회적 결과를 가져오는지 연구하는 동안, 사회물리학은 그 모든 것이 얽혀서 만드는 패턴에 주목한다. 저자는 말한다. "다이아몬드가 빛나는 이유는 원자가 빛나기 때문이 아니라 원자들이 특별한 패턴으로 늘어서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패턴일 때가 많고,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36)
세상일은 분석과 해설이 필요할 만큼 참 복잡하다. 어제의 다정한 이웃은 오늘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인종주의자가 되고, 근거 없는 소문 하나에 견고해 보이는 시장이 요동친다. 왜 그럴까. 저자는 그것을 "개인의 복잡성과 편차 때문"이라 말하고 있다. 오죽하면 "과학자들이 인간 세계의 법칙을 발견해서 완벽한 세계를 만들려고 해도 사람들은 거기에 반항한다는 것이다. 인간을 자신을 위해 차려진 밥상도 심통맞게 걷어차 버리는 '종잡을 수 없는 두 발 동물"이란다. 그가 그런 바보스런 행동을 통해 입증하고 싶은 것은 오로지 "그저 자기가 반항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이고.(57) 다른 사람이 아니라 도스토예프스키가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한 말이다.
인간에 대한 첫 번째 오해는 경제학이 오랫동안 믿어왔던 인간형으로서 합리적인 계산기계로서의 인간이다. 하지만 인간은 평생을 실험과 측정으로 보낸 프랜시스 골턴의 친척이 아니다. 인간에게 오류는 본능이고, 경제학자들은 돈을 벌지 못한다. 왜일까. 인간의 뇌속에 석기시대의 인간이 서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은 범용 컴퓨터가 아니다. 마음은 특정한 일을 더 잘 한다. ... 인간 마음은 특화된 작업을 위해 설계된 특수한 장치"로서 "수백만 년의 진화를 겪으면서 형성된 뇌는 그 구조와 기능 속에 모든 역사를 품고 있다. (결과적으로) 뇌는 수학문제를 풀거나 자동차를 운전하거나 위험한 재정투자를 평가하도록 진화하지 않았다.... (왜냐?) 인간 역사의 99% 기간 동안 조상들은 소규모 집단으로 방랑하면서 수렵과 채집으로 살았"(83)기 때문이다.
인류의 삶의 99% 기간 동안 "자연선택에 따라 뇌는 조상들이 매일 긴급하게 풀어햐 했던 문제를 풀도록 점진적으로 진화했다. 사냥, 짝짓기, 육아, 누가 믿을 만하고 누가 그렇지 않은지 알아보는 등의 일 말이다."(84) 이것 외에 인간이 갖고 있는 행동적 습관은 '손실 혐오'다. 인간은 잠재적인 손실보다 잠재적인 이득을 더 좋아한다. 따라서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 행동과 의사 결정에서 합리성은 최종적인 답이 아니다. 인간은 이성적인 계산기, 교활한 도박사가 아니라는 주장과 함께 인간은 적응적인 기회주의자라는 것이 인간에 대한 공통적인 정의다. 이러한 대전제 아래 사회적 원자로서의 인간 탐구가 시작된다.
여러 가지 흥미로운 사례들을 통해 저자가 첫번째 특징으로 든 것은 적응하는 원자다. 그것도 논리적 사고가 아니라 행동으로 적응하는 원자. 심리학자 줄리언 페르먼이 "사람들은 대개 논리를 따르지 ㅇ낳고 단순한 규칙을 사용해서 판단하고 시행착오를 통해 배운다"고 했듯, "세상은 행동으로만 파악할 수 있으며, 사색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다."(제이컵 브로노프스키, 103) 사람들이 여태까지 생각해온 것처럼(혹은 믿고 싶었던 것처럼) 세상의 모든 일은 "외부 충격이나 한 개인의 활동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 행동의 어떤 '사악한' 측면도 등락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모든 시장의 보편적인 특성인 거대한 변이의 경향은 행위자, 즉 이 세계의 원자들이 스스로 조직화해서 서로 얽혀 있는 섬세한 패턴에서 나온다."(109)
사회적 원자로서 두 번째 특징은 모방하는 원자. 인간은 부화뇌동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본 것이 아무리 확실하다고 해도 주위의 여러 사람이 그렇지 않았다고 하면 사람은 금세 자신이 본 것을 의심한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상황에 따라 사람들이 세상을 인지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진다."(129) 본능적 모방과 전략적 모방을 통해 인간은 논리적인 생각과 합리적인 판단 대신 불합리한 보편적 판단을 내리고 이러한 경향은 사람들을 통해 증폭되고 과장된다. 이러한 행동패턴은 거의 모든 상황에 적용된다.((음악회에서의) 박수 소리 데이터, 출생률, 핸드폰 보급률 데이터 등을 함께 놓고 시간 규모의 차이를 무시하고 보면, 세 현상이 모두 정확하게 동일한 수학적 곡선을 따른다. ... 우리는 보편적인 패턴에 따라 타인의 행동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143))'
사람들은 인간이 자유의지에 따라 여러 요소들을 고려해 합리적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우리 삶의 중요한 결정들은 대부분 어떤 힘, 사회적 힘에 반응한 결과다. 세상의 뭔가를 설명한다는 것은 핵심적 세부사항에 집중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무시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합리적인 계산 기계가 아니라 패턴을 인식하는 생물학적 존재이며 실수로부터 배운다. 이같은 모방은 사회적 입자(인간) 사이의 약한 상호작용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회물리학의 강한 상호작용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협력과 경쟁, 가족과 친구 같은 공동체를 만드는 요소다.
인간은 다른 모든 생물체와 같이 진화화 과정을 통해 형성되고 살아남은 존재다. 그런데, 진화는 타인의 안녕을 위해 자신의 이득을 버리는 생명체에게 친절하지 않다. 그렇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살아남은 인류에게 남아있는 이타심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토마스 홉스는 이것 역시 경제학적 관점에서 설명했다. 모든 이타심도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 "정의는 평화를 위한 명분이거나 우연의 산물일 뿐"이다.(152) 이게 다일까? 저자는 다시 생물학으로 돌아간다. "지금 우리가 하는 행동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 역사의 거의 모든 기간 동안 우리 조상들이 소규모의 고립된 수렵 채집 집단 속에서 살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166)
경제학에서 인간의 이기심과 그로 인한 공공재의 상실을 설명하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개릿 하딘의 '공유지의 비극'이다. 하지만 취리히 대학 에른스트 페르의 '공공재 게임'을 통해 인간 집단의 생존에 협력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반증해낸다. 한 마디로 이타주의는 집단의 생존에 기여한다. 개체들 간에 이타주의는 진화적 성공의 방해요소일지 몰라도 집단의 생존에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집단적 증오와 이기심과 뗄래야 뗄 수 없다. 그래서 다음 주제는 '집단주의'다. 강한 호혜주의는 개인이 뭉쳐서 사회를 이루고 집단 단위로 경쟁한 결과로 개인에게 남은 인간 본성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이것은 외부인, 즉 다른 집단 사람에 대한 맹목적인 적대감과 함께 온다.
실험을 통해 민족 중심주의는 추악하지만 인간 관계의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효율적이며 무엇보다 일단 민족 중심주의적 태도가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 나가면 더 협력적인 세계가 만들어진다. 지구상에서 일어난 민족분쟁의 원인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인종 청소에까지 이르는 증오와 불신은 두 가지 요소가 함께 작용해야 한다. 첫째, 경제가 혼란스럽거나 내전이나 혁명이 일어나서 건전한 사회적 상호작용이 무너지면, 사람들은 신뢰할 만한 사람들을 구별하기 위해 원시적인 메커니즘에 매달리게 된다. 둘째, 정치 지도자나 정당이 민족적 증요를 전략적으로 이용할 때다. 미국 역사가 헨리 브룩스 애덤스 말대로 "현실 정치는 '무엇을 가장하든, 언제나 체계적인 증오를 조직화하는 데 달려있다.'"(199)
실세계의 핵심은 단순함에서 나온다. 저자는 매 장마다 이런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그 단순함은 과학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세상을 지배하는 논리는 늘 확신이 증거를 압도한다. 그 한 예로 든 것이 부의 불균등한 분배다. 좌파는 자유시장 경제의 실패를, 우파는 부자들의 탁월한 능력과 노력을 든다. 하지만 부자의 비율은 강과 지류의 전체적인 구조와 비슷하다. 강의 지류를 만들어낸 것이 오랜 세월의 걸친 강의 유동성과 되먹임(침식과 지형 변화, 강의 흐름 변화)에 따른 것이듯 부의 불균등한 분포는 부의 유동성과 투자(되먹임)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것. 그러니 인간 세상에서 집단 수준으로 나타나는 수학적 규칙성에 주목할 것, 거기에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핵심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결론은? 저자는 흄과 스미스의 가르침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역사적으로 철학자들은 인간을 열정의 노예로 보거나 아니면 논리와 이성으로 자신을 통제하는 반신으로 보았다."(243) 그러나 흄은 둘 다 인간을 설명하기에 충분치 않다고 말한다. 흄은 인간이 논리적으로 추론하지 못하며 행위자 속에 숨어 있는 관습이 행위자로 하여금 자기도 왜 하는지 모르는 일을 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의 관습은 포괄적인 의미로 오랫 동안 전해내려온 사회 규범, 습관, 행동의 집합이고, 이것은 생물학적 혹은 문화적 경로를 통해 전승된다. 그리고 흄은 하나를 덧붙였다. "욕망이 인간의 행동 동기라는 기존 주장들을 부정하고 이타주의야말로 인간 특성의 진정한 요소"(244)라고.
이제까지 이야기한 것을 통해 저자는 인간이 오랫동안 역사적 법칙을 발견하려고 노력해왔고, 현대 학자들은 그 모든 노력은 실패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저자는 다르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발견한 것들을 합쳐보자는 것이다. 인간에게 뛰어난 지성을 가졌다는 점을 제쳐 두면, 인간이 진정으로 다른 종과 다른 점은 협력할 수 있다는 것이고, 친족이 아닌 낯선 사람과도 협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지구적 착취가 가능한 존재로 인간이 성장한 것은 바로 이 협력능력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을 만든 핵심 부품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집단의 경쟁과 갈등의 긴 역사 속에서 다듬어졌다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더 협력적인 사람들만 살아남았"(248)기 때문이다. 이제 이 모방과 적응, 상호작용이라는 인간 종의 핵심 부품을 제대로 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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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새로울 것 없는 내용이다. 인간은 합리적이라고 암만 세상이 떠들어대도 사람들은 계산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고, 살아갈수록 노력이나 재능과는 무관한 운 혹은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우연이 인간의 삶을 더 좌지우지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살아갈수록 세상은 왜 이런 걸까, 이 세상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원리 같은 건 없을까 같은 의문조차 드물게 품게 되니까. 책을 읽으면서 나도 저자 따라 걱정하게 된 것이 하나 있다.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자유경제이론 - 왜 그 유명한 말 있지 않은가. 우리가 빵과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건 제빵사와 정육점 주인의 자비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이라는 - 과 달리 합리적인 수준의 공정성과 호혜성을 갖고 있다는 게 여러 실험으로 입증되고 있는 반면, 이기주의를 강조하는 현대 경제 이론 탓에 경제학자들 자신이 '보통' 사람보다 더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실제 실험 결과가 그랬다고 한다. 이 관찰 결과 내려진 "이기주의 모형에 노출되면 스스로 이기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는 결론을 보고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조금 걱정스러워진다. 세계 각국 정부들이 경제학자의 조언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164) 나도 걱정된다.
그리고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세상의 정치 논쟁이 대부분 확신이 증거를 압도하는 반면, 과학 이론이 제기하는 구체적인 주장은 검증 가능한 동시에 그것이 원리적으로 오류임을 밝힐 수 있는 가능성을 가져야만 존경받는다는 사실! 그러니까 대부분의 과학 이론은 "목을 내놓음으로써 존경을 얻는다"(213). 나의 입장과 견해가 옳다 그러므로 너는 틀렸다는 투의, 증거를 압도하는 확신이 난무하는 세상에 지쳐있던 내게 참으로 청량한 말이었다. 그래서 요즘 들어 과학 책이 그렇게 좋았던 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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