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니즘, 이라는 말처럼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말을 들으면 문득, 마음 깊은 곳에서 뭔가가 꿈틀대곤 했다. 아무도 의심할 수 없는 절대 진리를 찾아헤맸으면서도, 막상 누군가 '이것이다' 하면 글쎄, 싶어지는 거다. 내츄럴 본 회의주의자여서일까, 아님 절대 진리에 안착하고 나면 더 이상 찾아야 할 것이 없어지기 때문에? 내 마음 나도 모르겠다. 전에 즐겨보던 한 TV 프로그램에서 아프리카에서 온 한 여인을 비인간적으로 대우하며 순회 전시까지 한 유럽인의 야만적 행위를 간략하게 극화해 보여주었는데, 마지막 멘트가 아프리카에서 온 여인의 나라에서 그들 자신을 일컫던 말이 '인간'이었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그 말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그게 꽤 오래 전 일이었는데도 아직까지 기억나는 걸 보니 걸려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걸린 모양이다. '미학적 인간'을 보다가 이런 대목을 읽고 이것 때문이었던가 싶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자기 자신들 - 자신들의 집단이나 종족-을 가리키는 단어가 '사람'이나 '인간'을 가리키는 단어와 똑같은 오늘날의 여러 사회에서 볼 수 있다.(예를 들어, 이뉴잇, 음부티, 오로카와, 야노마뫼, 칼룰리) 이런 사회에서는 다른 동물은 물론이고 심지어 다른 부족 사람들도 다른 이름들로 부른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예는 남미의 문두루쿠족으로, 그들은 다른 부족 사람들과 동물들을 한 범주인 '사냥감'에 포함시킨다. 어쨌든, 세계 도처에서 다른 사람들을 비인간으로 보고 그들에게 모욕적인 이름을 너무나 쉽게 붙이는 것은 비참하지만 명백한 현실이다. 그런 이름을 붙이는 집단은 상대 집단을 자신과 다르게 보고 그래서 '남'을 다르게 심지어 비인간적으로 취급할 권리를 부여받은 것처럼 행동한다." (미학적 인간, p. 150)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과 그 TV 프로그램의 해설이 은밀히 품고 있는 관용이라든가, 도덕이라든가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비관적 정치철학자, 염세주의자, 허무주의자로 불리는 영국의 정치철학자의 책,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는 정교하고 논리적인 정치학 책이라기보다 영감으로 가득찬 에세이다. 현생 인류를 가리키는 호모 사피엔스 대신 '약탈적인' 이라는 의미의 'rapacious'에서 따온 라피엔스로 인류를 칭한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진보와 자아, 자유의지는 모두 환상이고 신화"라고. "휴머니즘은 과학이 아니라 종교다. 인류가 이제까지 존재했던 어떤 세상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기독교 시대 이후의 신앙이다. 기독교 시대 이전의 유럽 사람들은 미래도 과거와 다를 바가 없으리라는 생각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지식과 발명은 향상될 수도 있겠지만 윤리는 대체로 그대로일 터였으며, 역사란 궁극의 의미를 갖지 않은 채 흘러가는 일련의 순환과정이다"(p. 11) 이 책은 이런 저자의 생각을 수많은 인용과 여러 겹의 함축적인 문장들에 담았다. 읽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의 밑줄을 칠 수밖에 없었다.
첫 장의 포문을 여는 것은 이런 문장이다. "생물 종은 서로서로, 그리고 변화하는 환경과 무작위로 상호작용하는 유전자 조합에 불과하다. 생물 종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16) 생물 종에 대한 이런 일반적인 정의의 속내는 뻔하다. 여기서 동물의 한 종일 뿐인 인간은 어떻게 예외일 수 있는가. "종이란 이리저리 부유하는 유전자의 흐름이 만든 경향일 뿐"(19) 인류가 의식이나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온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믿는 과학적 진보는 확실히 누적적이지만 그것이 증명하는 것은 오로지 그 사실 뿐이다. 그것이 인간의 취약함을 해결해왔다는 증거는 아무데도 없다. "대부분의 인간은 간헐적인 도덕심에 의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이기심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더더욱 아니며, 그 순간의 필요에 따라 움직인다."(34)
"동물들은 태어나 짝을 찾고 음식을 구하다 죽는다. 그게 다다."(59) 그러나 휴머니스트들은 인간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의식과 자아와 자유의지며, 이것들이야말로 인간을 다른 모든 생명체보다 우월하게 만들어 주는 요소라는 뿌리 깊은 믿음에서 나온다."(59) 하지만 인간의 삶은 분절된 꿈의 조각 같은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성공적 진화에 복무할 뿐, 진리나 목적에 향하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는, 휴머니스트들이 믿는 것처럼 진보해오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이 믿었던 것처럼 성장과 쇠퇴를 반복하는 일련의 자연적인 순환이었고, 인도인들이 믿어왔던 것처럼 무한히 반복되는 꿈의 집합일 뿐이다. 흄은 역사는 진보가 아닌 문명과 야만이 번갈아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보았다. 인류 역사가 의미를 가진다거나 발전해왔다는 것은 기독교적 편견일 뿐이다. 휴머니즘이 종교인 이유다.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인간의 행동이 의식적으로 지각되지 않는 상태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증명하고 있다. 휴머니스트들이 믿는 것처럼 인간의 자아가 어떤 본질적인 일관성이 표현된 것이 아니며, 인간은 곤충이나 나무와 마찬가지로 생명 조직상의 패턴일 뿐이다.(103) 말하자면, "인간은 기억이 우연히 엮어놓은, 감각들의 꾸러미"다.(105)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자아 관념은 태고부터 존재하는 인간의 오류며, 그 자아의 힘으로 우리는 꿈속에서처럼 삶을 살아"갈 뿐이다.(109) 인간이 진보하고 있다는 것은 착각이다. 대규모 학살은 언제나 세계를 개선한다는 거대한 프로젝트 하에서 이뤄졌다. 소련에서는 1917년부터 1959년 사이 6천만 명이 공공정책 하에서 죽었고, 나치의 홀로코스트도 그랬다.
이러한 이야기가 전개되는 '비극의 죽음'은 통째로 외우고 싶은 장이다.(131-136) 이 장에서 알게 된 작가가 러시아의 바를람 샬라모프. 22살에 체포되어 20년 넘게 수용소를 전전했는데(그 수용소들의 얼마나 지독한 곳이었는가 하면 매년 수감자의 3분의 1, 또는 그 이상이 숨져서 적게 잡아도 총 3백만 명 가량이 목숨을 잃던 곳이었다), 17년 동안 머물렀던 마지막 수용소 '콜리마'를 나온 후 '콜리마 이야기'를 썼다. 거기엔 그런 말이 나온단다. "'나라면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생의 진짜 바닥에 내려가 보지 않은 사람이다. 그는 '영웅들이 없는 세계'에서 숨을 거둘 필요가 없었던 사람이다."(134) 최악의 경우가 닥치면 "인간의 삶은 비극적이지 않고 무의미하다. 영혼은 부서지지만 삶은 계속된다."(135)
이 책을 읽기 직전에 "그들의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읽었는데, 그 책은 내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왜냐면 그 책은 무너진 경제에는 책임질 사람들이 있고 그것만 경계하고 수정하면 된다는, 인간의 영원한 번영이 전제된 낙관에 자꾸 고개가 갸웃해졌기 때문이다. 존 그레이는 말한다. "번영은 욕심, 허영, 시기와 같은 악덕에서 나온다"(145) 그래서 저자는 윤리의 기원을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공유하는 미덕에서 찾아보라고 권한다. "윤리란 고기잡이나 수영과 같이 실질적인 삶의 기술이다. 윤리의 핵심은 선택이나 의식적 각성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아는 솜씨다. 이 솜씨는 경험을 통해서, 그리고 비워 낸 마음을 통해서 온다."(151) 문제는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 아니라 "충동들이 자생적으로 자신의 방향을 찾아내 문제가 스스로 해결되도록 두"는 것이다.( A.C. 그레이엄, 151)
삶의 목적과 의미. 그것은 인간의 필멸을 부정하려는 데서 나온다. 우리의 육신이 쉽게 닳아 없어진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렇게 시간과 우연에 종속됨으로써 육신은 "우리가 진정으로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다.(188) 유일하고 영원한 실재를 찾아헤매는 한, 우리는 우리의 필멸을 인정할 때에만 갖게 되는 "삶에 대한 성의있는 태도"를 잃게 된다.(191) "호모 라피엔스는 많은 생물 중 하나일 뿐이고, 딱히 영원히 지속되어야 할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머지 않아 인간 종은 멸종할 것이다. 인간이 사라지고 나면 지구는 회복될 것이다. 인간 종의 마지막 흔적이 사라진 후, 인간이 파괴하려고 했던 다른 많은 종이 다시 번성할 것이다. 또한 존재하지 않았던 또 다른 종들도 함께 번성할 것이다. 지구는 인간을 잊을 것이다. 삶의 놀이는 계속될 것이다."(196)
미래의 인간의 삶에 대한 저자의 예측은 너무 정확해서 섬뜩하다. 경제는 더 이상 생산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럼 무엇에 의해? 바로 오락이다. "만족이 번영을 위협하는 이 시대에, 과거에 금지됐던 쾌락은 경제를 이끄는 새로운 핵심 요소가 되었다."(209) 우리는 계속 구매할 기이한 새로움을 끊임없이 찾고, 무의미한 노동은 오로지 무의미한 폭력으로만 치료할 수 있다. 실체없는 금융시장은 전염과 히스테리에 의해 움직이고. 또한 미래의 전쟁은 자원의 희소성을 둘러싼 전쟁이 될 것이고, 그것은 그 어느 때보다 파괴적일 것이다. 존 그레이는 말한다. "어쩌면 우리는 20세기가 평화의 시대였다고 기억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232) 암담하고 암울하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존 그레이는 2장 말미에 이런 질문을 던졌다. "예전에는 철학자들이 진리를 추구하는 척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추구했다. 아마도 우리는 다른 목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테면, 어떤 환상을 포기할 수 있고 어떤 환상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지를 발견하는 것 말이다. 여전히 (그리고 과거보다 더) 우리는 진리를 추구하겠지만, 환상 없는 삶에 대한 희망은 버릴 것이다. 이제 우리의 목적은 우리가 이길 수 없는 환상들이 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없앨 수 있는 환상은 무엇이며, 없애고는 살 수 없는 환상은 무엇인가? 이것이 제기되고 있는 물음이며, 이루어지고 있는 실험이다."(116)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마도 저자의 답이리라. 그 답은 맨 마지막 장, "있는 그대로"에 나온다.
"오늘날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좋은 삶은, 과학과 기술을 한껏 활용하되, 그것이 우리에게 자유롭고 합리적이며 온전한 정신을 주리라는 환상에는 굴복하지 않는 삶이다. 평화를 추구하되, 전쟁 없는 세상이 오리라는 희망은 갖지 않는 삶이다. 자유를 추구하되, 자유라는 것이 무정부주의와 전제주의 사이에서 잠깐씩만 찾아오는 가치하는 점을 잊지 않는 삶이다. 좋은 삶이란 진보를 꿈꾸는 데 있지 않고 비극적인 우연성을 헤쳐나가는데 있다. ... 진보는 게으름을 경멸한다. 인간을 구원하는 데 필요한 노동은 방대하다. 하나의 고원이 정복되면 또 다른 고원이 솟아나기 때문에 실로 끝이 없다. 물론 이것은 신기루일 뿐이다. 하지만 진보의 가장 나쁜 점은 그것이 환상이라는 점이 아니라, 끝이 없다는 점이다."(246-247) 진보라는 환상을 향한 시지프스의 노동은 이제 그만!
"동물들은 삶의 목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기모순적이게도, 인간이라는 동물은 삶의 목적 없이는 살 수가 없다. 그냥 바라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삶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일까?"(252)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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