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학술서가 그렇지만 이 책 역시 내용의 대부분은 저자가 세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한 사례들도 가득 차 있다. '진화 미학'이라는 책의 간단한 정의가 말해주듯 저자가 세운 가설은 "예술은 아무 쓰잘데기없는 고상하고 심오한 정신적 활동이 아니라 인간이 더 잘 생존할 수 있도록 도와준, 아주 기본적이고 모든 인간 안에 내장되어 있는 인간 본성"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람들이 믿고 있는 예술에 대한 선입견을 문화인류학자들의 연구성과를 들어 반박하고 있다. 영국의 저명한 해부학자(!)인 J.Z. 영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예술은 모든 생물학적 기능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기능, 즉 생명은 가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능을 하는데, 결국 이것이 그 존속을 보장하는 최종 보증서다."(44)
저자가 가장 먼저 근거로 든 것은 인간이 예술에게서 느끼는 흥분과 쾌감이다.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예술작품을 지적으로 분석하거나 해석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분명, 육체적이고 감정적인 것이다. 우리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은, 어떻든 인간의 진화과정에 생존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매우 의미있는 선언이 하나 나오는데, 사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약간 충격을 받았다. 그건 바로 예술은 '행동'이라는 선언이다. 현대인들에게 예술, 아니 정확히 예술품이라는 것은 주체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존재하는 객체일 뿐이다. 나에게도 물론 그랬고.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예술은 놀이처럼, 음식 나눠 먹기처럼, 울부짖기처럼, 하나의 행동(충족시키면 기분이 좋아지는 '욕구')으로 간주될 수 있다. 즉, 그것은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다시 말해 그것이 없을 때보다 있을 때 더 잘 생존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다.... (그리고) 그것은 선택받은 소수의 배타적 소유물이 아니라, 헤엄치기(난 헤엄 못 치는데!!)나 섹스처럼 모든 사람이 그런 성향을 타고났기 때문에 모두에게 잠재적으로 가능한 일종의 행동인 것이다."(87-88) 사실 이 대목을 읽고 아, 하고는 책을 덮으려고 했다. 예술이 인간의 본능이라는 걸 알기 위해 이 책을 다 읽는 것보다 그 행동을 지금 당장 시작하는 것이 훨씬 좋은 일이 아닐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최근 새로 한 결심이 '한번 시작한 책은, 적어도 그 책이 가치있다고 느꼈다면 끝까지 읽을 것'이었기 때문에 계속 읽었다.
그렇다면 예술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 첫 자리에 오는 것이 특별화하기의 욕망이다. 예술이 처음에는 '기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예술은 처음에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기 보다는, 그 사물의 실용적 용도는 아니더라도 표면상의 용도를 향상시키는 것으로서 존재했다."(97) 저자는 이러한 비일상성을 핵심개념으로 예술의 공통분모를 찾아간다. 거기서 가장 먼저 발견된 것은 동물행동학적으로 동물이 보여주는 유희행동, 원시 인류가 보여주는 제의를 들었다. 둘다 괜한 에너지 소모나 되지, 직접적인 이익은 전혀 되지 않는 것들이다. 일상에서 벗어난 예술의 이 비일상성의 또다른 공통점은 둘 모두 어떤 제약이 있다는 것이다. 동물들이 유희를 할 때는 그것이 놀이임을 의미하는 특별한 신호(꼬리치기, 발톱 안 쓰기 등)가 존재한다고 한다. 제의 역시 '-인 체'하는 행위다. 저자는 유희와 예술의 공통점으로 바로 이것을 꼽는다. "예술과 유희의 현저한 핵심적 특징은 '은유적' 본질, 즉 어떤 것이 실제로는 그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인 가상적 양상에 있다는 것"(104)이다. 그러면 원래 논지로 돌아가 이게 어떻게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것일까. 동물은 유희를 통해 먹이를 찾고 자신을 보호하고 짝짓기 하는 등의 실용적 기술과 사회적 기술을 익힌다는 것이다. 당연히 유희를 하는 동물들이 그렇지 않은 동물들보다 훨씬 더 잘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예술의 효용은? 저자는 슬쩍 프로이트를 불러온다. 프로이트는 유희와 예술의 기능은 치료라고 했단다. "유희와 예술은 실생활에서 거부되거나 터부시되는 숨겨진 욕망의 승화 또는 충족을, 다시 말해 환상을 허용한다는 것이다."(105)
결혼이나 장례 등의 원시적 형태를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 이런 제의들은 '진짜'에서 점차 '기만'으로 변화해왔다. 고대에는 내세를 위한 진짜 사람들을 함께 묻었지만 점차 사람 대신 인형을 대신 묻은 것처럼. 게다가 장례 절차 같은 걸 보면 슬픔이나 상실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공개적으로, 반복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그런 감정을 마음에서 몰아낸다. 저자는 이것을 "예술은 감정의 용기(容器) 또는 주형(鑄型)이라고 표현한다. 자, 그런 예술과 제의의 공통점을 찾아볼까. 첫째, 제의와 예술은 둘 다 흡인력이 있다(compelling). 둘째, 의도적인 비일상성(nonordinary). 셋째, 사회적 강화, 참여자와 관객을 한 분위기 속에 결합시킨다. 넷째, 실생활, 혹은 평범한 삶으로부터 별도로 차단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 사회의 제의에는 사회적 목적이 있다. "인간 집단의 가치관을 표명하고 공식적으로 강화하며, 인간 집단을 곹옹의 목적과 믿음으로 결합하고, 불가해한 일들-출생, 죽음, 질병, 자연 재해-을 '설명'하는 동시에 그것을 통제하고자 하고 견딜 수 있게 만드는 것"(110) 등이 그것이다. 제의가 예술의 기원이라는 것은, 뭐 저자가 발견한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저자도 순순히 이걸 깨달은 사람들 중에 자기가 꼴찌일 거라는 걸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의 독특한 점은 인간이 갖고 있는 '특별화하기'의 경향이 예술과 어떻게 연관을 맺고 있는지를 추구하고 있는 거다. 그는 이 특별화하기가 최고의 맥락에서는 필요하고 실용적인 것이었을 거라고 가정한 것이다. 이 대목은 또 한 번 나를(다분히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에 오염된) 놀래켰다. 그건 특별화하기로부터 나오는 미적 쾌감은 그 속에 담긴 메시지와 애초에는 분리되지 않았을 거라는 주장이다.(이후에 저자가 생각하는 특별화하기에 내포된 의미를 길~게 쓰고 있으나 나는 생략한다. 번호까지 매겨서 친절하게 잘 정리해 놓았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일독해보시길.126-134)
예술에 대한 또 하나의 편견은 예술과 자연은 서로 대척점에 있다는 보는 것이다. 고도로 예술적으로 보이는 동물의 짝짓기 유희라도 그것은 본능이지만 아무리 조악한 인간의 제의라도 그것은 후천적으로 학습된, 이른바 문화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진화미학자답게 이렇게 주장한다. "제의의 거행 이면에는 특별화하기와 관련이 있는 '선천적인 행동 경향성'이 숨겨져 있다"(144)고. 인간은 "위협적이거나 난처하거나 불확실하다고 지각되는 상황에서 강한 감정이 요구되는 경우에 인간은 다른 동물들처럼 단지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는 경향성을 갖고 있다."(144) 이 대목을 읽고 난 인간이라는 종 자체가 몹시 사랑스럽고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이런 경향성을 조셉 로프레아토라는 사람은 "행동하라는 명령(imperative to act)"라고 명명했고, 그는 빌프레도 파레토의 말을 인용했단다. 말리노프스키도 비슷한 인식을 했고. 인간은 강한 감정을 느끼면 반드시 그것을 어떤 행위 형식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의 핵심 개념은 제의를 가리키는 그리스 단어 '드로메나'다. 저자는 제인 엘렌 해리슨의 이런 말을 인용한다. "제의를 가리키는 그리스 단어는 '행해진 것'이라는 뜻의 '드로메논(Dromenon)'이다... 제의를 거행하려면 어떤 일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어떤 것을 느껴야할 뿐만 아니라 그에 반응해야 한다."(고대 예술과 제의)(145) 그리고 이 모양짓기와 공들이기라는 미적 행위는 예측 불가능한 '타자'의 세계, 즉 무법적인 자연에 대한 선천적인 반응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기분좋게 만드는 반응이다."(162) 비록 생산된 것이 후천적이고 문화적인 것일지라도 그 뿌리는 본능, 혹은 자연에 있다.
그럼 예술의 일반적인 형태들 - 미술, 음악 등 - 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자연에는 없는 기하학적 형태는 어디에서 왔을까. 저자는 그 근거로 게슈탈트 심리학을 끌어온다. 루돌프 아른하임의 말대로 "단순성은 모든 형태의 신체적 심리학적 힘들이 지향하는 상태"(166)로서 인간의 마음은 어떤 것을 지각하면 자연스레 그것의 원형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하학적 형태의 탄생 비화와 연결되는데, 자연에서 나타나는 비정형적인 형태를 기하학적으로 만듦으로써 인간은 공간에 형태를 부여하고 공간을 제어하려 했다는 것이다. 음악의 가장 기본이 되는 리듬도 마찬가지.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최초의 그리고 가장 본래적인 환경적 사실이 바로 리듬이었고, 단순한 고동의 세계에서 복잡한 혼돈의 세계로 나온 아이의 적응을 돕기 위해 우리는 아기를 토닥이거나 규칙적으로 흔들어준다. 이러한 "기하학적 형태의 생산과 반복, 소리나 동작의 반복과 양식화는 지배, 안전, 불안 해소의 즐거운 느낌을 제공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생물학적 경향"(170)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 또한 예술이 고도의 상징적이라는 것에 물론 동의하지만 그와 동시에 기본적으로 감정적이고 관능적이라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는 의문 하나. 그래서 그 특별화하기가 인간의 생존에 어떤 도움을 주었다는 건가. 식량을 얻기 위해 사냥을 나가는 것처럼 중요한 일을 할 때, 인간은 특별화한 행동을 했을 것이다. 이것이 예술의 원초적인 형태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생존 수단을 전유하기 위해서는 과학 기술적 요소들과 더불어 심리적 또는 감정적 요소들이 필요하고, 문화적 제어가 요구되는 '자연'에는 물리적 환경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동과 감정이 필요하다."(184-185) 저자는 유물론적 사고가 결과적으로 실패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런 사실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유물론적 사고의 부적절함은 '향상 수단(즉, 내가 위에서 개략적으로 언급한 인간행동과 감정에 대한 제어)'이 거의 항상 생산 수단의 제어와 본질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않는 데 있다, 185)
다 그렇다 치고, 그렇다면 인간의 예술은 동물의 본능과 무엇이 다를까. 사회과학자들의 예술의 고유성은 상징의 처리와 조작에 있다고 보지만 저자는 "예술의 전상징적(presymbolic) 원천이 생물학적 재능으로서의 그 본질을 이해하는 데 훨씬 중요하다"(186)고 믿는다. 이걸 입증하려면 저자는 적어도 두 가지 질문에 답을 해야만 한다. 예술이 진화과정에 도움이 된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이라면,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가, 또 하나는 예술이 인간의 진화에 선택 가치가 있는 행동인가. 여기서부터 지구상의 온갖 부족과 인류학자들의 보고서들이 예술의 각 장르별로 등장한다. 예술이 지금 서구사회와 같이 인간의 생활에서 배타적으로 분리되지 않은 상태를 살피는 것이다. 파푸아뉴기니의 와기족의 외모 꾸미기, 아프리카 바송게족의 음악, 딩카족의 외적 꾸밈, 서아프리카의 템네족과 이보족의 미 개념, 파푸아뉴기니 멜파족의 모카 축제, 제의에서 사용되는 여러 부족의 언어... 이 모든 것들은 모두 '타자'(자연을 포함해서)를 움직이고 제어하려는 시도들로서 인간의 진화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인간의 일상적 삶에 넓게 스며있다. 그리고 각 형식의 예술은 수많은 본질적 방식으로 그 개별 당사자들의 번식 성공에 기여하며, 제의는 집단적 가치를 가르치고 합의, 협동, 단결, 신뢰를 촉진해 집단의 생존력을 높인다. 하지만 현대는 그러한 성향으로부터 인간을 너무 멀리 데려와 버렸다. 과거의 인공적 특별화하기가 진기한 것이었다면, 지금은 자연적인 것이 더 진기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그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우리는 무엇에 주목해야 하는가. 바로 미적 감정의 회복이다. 저자는 책 처음에서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책에 묘사한 예술의 감흥의 순간을 인용해두었다. 그이는 무엇보다 예술적 감정의 육체성에 주목한다. 인간의 마음과 감각은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이건 최근에 재밌게 읽은 '사회적 원자'에서도 나온 이야기다. 인간은 지금의 인간이 되기까지 몇 만 년의 진화시기를 거쳤는데, 인류의 역사를 총 800명 분의 수명이라고 가정하면 거의 792-3명까지는 동굴에서 살며 수렵 채취를 했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과 감각은 아직 석기시대에 머물러 있고, 뇌는 석기시대에 생존하기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알게 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인터넷을 쓰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하더라도, 석기시대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우리의 신체적 감각에, 특히 보고 듣고 만지에 것에 기초한다."(275) 근대를 관통하면서 지식, 정신, 마음, 영혼, 경험까지 분리해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인간 지각의 생태학적 기초는 "세계에 대한 의식과, 세계와 자신의 상보적 관계에 대한 의식은 분리할 수 없다(제임스 J. 깁슨)(279)"는 것이다. 저자는 또 여기서 이걸 입증하기 위해 수많은 인지과학적 사례들을 든다. 결국 미적 감정은 표상들은 각기 다른 감각, 감정적 특성에 기초하여 다양한 연산망에 연결되고, 인간은 인간이 가진 선천적 지각, 인지, 감정적 요소들로 예술적 감정을 경험한다. 이것이 예술 경험의 육체성이다. 저자는 인간이 가진 자연으로적으로 미적인 선천성으로 여러 가지를 들고 있다. 1. 공간적 사고, 우리 몸의 공간적 위치, 점유하는 공간의 양, 우리와 다른 사물 간의 공간적 거리, 이 모든 것이 무언의 자각으로 존재를 느끼는 실존적 소여물(所與物)이다. 2. 이항대립(경험의 한 측면이나 한 측면의 개념은 보이지 않는 반대 개념을 포함한다)이나 원형 인식(새로운 자극과 마주칠 때, 뇌는 해당 범주의 원형과 얼마나 비슷한가에 기초해 그것들을 하나의 지각범주에 할당한다) 같은 인지적 보편특성들, 3. 유추와 은유(한 감각 양식으로 받은 정보를 다른 감각 양식으로 번역하는 선천적인 능력, 그리고 그 매치의 최종 기준은 외적 행동 사건이 아니라 내적인 감정 상태다).
이 대목에서 제일 재미있었던 것은 언어 자체에 숨겨진 은유가 가득하다는 사실. 대부분의 은유는 방향적이거나 공간을 이용하는데, 메리 레크론 포스터는 모든 언어의 기원이랄 수 있는 공통조상언어(원시언어)를 재구성한 후, 언어는 발성기관이 그 지시대상을 유추적으로 모방하는 일종의 의성으로 시작되었을 거라고 주장했다. 여러 가지 예들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이거다. pl이나 fl은 입술이 앞으로 튀어나오고 그런 다음 혀가 치조돌기로부터 멀리 당겨지는데, 이런 발음이 들어가는 단어의 뜻은 그 입술과 혀 모양처럼 외부로의 연장과 퍼짐을 나타낸다고 한다. 핀어, 니안자어, 하누누어, 타밀어, 유록어, 영어 등을 비교했다. 책에는 한글 예로 나와 있는데(번역자님, 수고하셨습니다), 매우 일리있어 보인다. 가령, 영어의 flood, fly, flat.. 같은 게 그렇다면 한글은 내뿜다, 뻗치다... 뭐 그런 것들이겠다. 그러니까 인간의 말을 구성하는 소리 패턴들의 감정적 의미에도 공간적 은유나 유추가 본질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313) 아, 신기하여라. 하여튼 이런 신기하고 재미있는 예들이 많이 나오니까 이 부분을 재미 삼아 읽어보셔도 좋겠다.(304-318)
그 다음 인간의 미적 선천성으로는 4. 시간성과 감정이다. 저자가 편의상 미적 선천성으로 다 분리해놓긴 했지만 공간을 시간성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을까. 저자는 감정 또한 시간, 공간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니, 이건 저자의 말이 아니라 예술심리학의 선구자랄 수 있는 루돌프 아른하임이 한 말이란다.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은 지각을 도구로 이용하는데 거기서 생겨나는 것이 감정이다. 그런데, 이 감정이란 건, 그저 "형태, 크기 색조, 높낮이 같은 정적인 측면들에 대한 지각이 아니라 그런 자극들이 전달하는 방향성 긴장에 대한 지각"(321)이라는 것이다. 뭔가 알듯 모를 듯한 이 개념 역시 망치로 머리를 때리는 듯한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육체적 은유처럼만 보이는 '방향성 긴장'에 명백히 신경생리학적 근거가 있다는 주장이 바로 아른하임의 '동형 구조(isomorphism)' 개념이란다. 동형구조는 어떤 두 개의 구조상 조직이 일치하거나 부합하는 것, 일종의 정확한 유추를 가리키는 말이다. 아른하임의 추정은 "지각 대상의 구조가 심리적 과정과 '도상적으로' 일치하고, 뇌의 전기화학적 정보처리 과정에서 그에 상응하는 신체적 또는 감정적 활동이 유추적으로 생산될 때, '동형 구조'가 발생할 수 있다."(321)는 것이다. 323쪽에서 324쪽에 걸쳐 나오는 브루스 채트윈의 선율-지리의 동형구조의 예는 감동적이니 관심 있으시면 읽어보시도록(매우 짧음). 그 예는 이런 말로 마무리된다. "...하나의 악절은 지도 위의 지점 표시이며, 음악은 온 세상을 돌아다니기 위한 기억장치다." 멋지지 않은가!
미적 선천성 5번 타자는 정동의 증폭. 인간의 감정에는 시간과 공간이 통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신경이 몇 번의 임펄스로 점화되는가에 따라 내적 감정의 정도까지 알 수 있다는 것인데(실번 톰킨스), 이는 학습되는 감정과 다른 생물학적 의미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걸 정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뭐라뭐라 어려운 설명이 나오지만 쉽게 말하면 보통 감정이라고 말하는 정동이 신경 자극에 의해 활성화되면 우리가 흔히 생리적 반응이라고 하는 것이 육체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큰 소리를 들으면 놀람 반응(갑작스럽고 강렬한 신체경련)이 나타난다는 얘기. 이런 반응이 우리 진화 과정에서 어떤 경험에서 어느 정도의 이익과 손해를 예상하고 어느 정도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표시기 역할을 해왔다는 게 이 주장의 요점이다. 다시 말해, 이제까지 말한 "미적 경험의 기초요소들은 선택상 쓸모있는 환경에서 진화했고, 그래서 우리의 생물학적 본성과 관련된 선천적인 최저자극수준(빠른/느린, 시끄러운/조용한...)을 갖게"( 327) 되었다는 거다. 미적 선천성 6. 유아기의 보편적 경험으로부터 발생하는 연상들. 이건 뭐 따로 설명이 필요없겠다. 하여튼 이 긴 논의의 결론은 발터 벤야민의 말을 빌어 마무리된다. "조응correspondances)은 기억의 자료인데, 역사의 자료가 아니라 선사의 자료다." 저자는 이렇게 시적으로 결론 맺는다. "우리가 의식하는 것, 우리가 예술에 대한 경험에서 지적으로 식별하는 것은 지하수가 솟구친 자리에서만 발생한다. 그 원천과 고유한 향은 언어 이전의 선사시대에 광활하게 뒤덮은 암석 지대를 통과해 흐르고 있는 기억 저편의 지하수에서 배어나온다."(332)
저자가 싸우자고 덤빈 대상은 예술을 인간에게서 떼어내버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지 싶다. 저자는 여러 번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들고 일어나 폐기한 구조주의자들의 논지를 되짚는다. 인간에게는 기본적인 인간 능력을 낳는 보편적인 마음의 구조나 원리가 존재한다고. 저자는 예술은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 동시에 영향을 미치며, 예술 자체가 바로 총체적 존재인 개인의 여러 양상들이라고 말한다. 마음와 육체를 분리해 우열을 매긴 근대적 시각에서 벗어나 이 둘을 다시 통합하라고. 결론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계몽 운동 이전까지는 어떤 사회도 예술의 사용 맥락(대개 제의나 오락)이나 그것이 묘사 또는 암시하는 내용과 분리된 하나의 실체로 간주하지 않았다."(352) 하지만 근대로 넘어오면서 세 가지 예술에 대한 개념이 생겨났다. 첫째, 객체와 그 유용성 또는 사회적 종교적 효과에 대한 개인 관심을 완전히 배제한 '무관심한 태도'. 둘째, 예술 작품은 특별한 종류의 지식을 전달하는 매개체라는 인식, 셋째,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개념. 그래서 '예술의 종말'이란 책을 쓴 아서 단토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어떤 것을 예술로 보기 위해서는 예술 이론이라는 대기권과 예술에 대한 지식만 있으면 된다."(355)고. 이 식자능력과 근대성에 바탕한 오늘날의 예술에 대한 인식은 저자가 보기엔 기만이고 허구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사고와 경험은 모두 언어로 이루어졌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삶을 실제로 살기보다 그것을 읽고 쓰는데 치중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잃고 있다고. 사실 우리가 읽을 수 있었던 시기는 인류 역사 전체 가운데 1%도 되지 않는다. 논리, 수학적이고 언어적 능력에만 치중하는 동안 간과되거나 평가 절하해온 '지능들'에는 인간, 아니 인류의 삶이 녹아 있다. 예술이 삶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고, 소수가 만들고 소수가 누리는 것이라는 막연한 인식은 어쩐지 슬프다. 불과 얼마전까지도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현대와 같은 복잡한 예술 개념 없이 모든 구성원들이 몸과 소유물을 장식하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시를 짓고, 연기를 하는 등 예술가로 살았다. 그것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삶을 위한 예술"이었다. 게다가 놀랍게도, 이것은 인간 활동의 고유한 방법들로 배우지 않아도 모두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호모 에스테티쿠스, 만세!
'밑줄긋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 종의 핵심 부품은? (0) | 2011.03.26 |
---|---|
진보는 환상이다 (0) | 2011.02.26 |
사랑과 증오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0) | 2011.01.29 |
철새의 긴 여행에 가슴이 뛰었던 소년은 자라서 (0) | 2010.09.26 |
유러피언 드림 (0) | 2010.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