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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러피언 드림

양화 2010. 9. 5. 20:06

그러나 나는 유러피언 드림이 어려운 시련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강한지는 확신할 수 없다. 문화적 다양성과 평화 공존에 대한 유럽인들의 의지가 미국이 겪은 9.11 테러나 스페인이 겪은 3.11 테러 같은 참상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확고할까. 세계 경제가 깊은 장기침체에 빠져 세계적인 공황 사태가 발생해도 유럽인들이 포괄성과 지속 가능한 계발의 원칙을 고수할 수 있을까. 사회 혼란과 거리 폭동이 발생해도 개방되어 있고 과정 지향적인 다단계 통치 체제를 유지할 인내심을 갖고 있을까. .... 젊은 세대 사이에는 낙관론이 우세하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기대할 수 있고, 기대해야할 전부인지 모른다.             p. 495 - 496 

 

엊그제 오랜만에 우리 회사(관뒀는데, 어따 대고 아직도 우리 회사냐? -.,- 여튼) 직원과 메신저를 하게 되었다. 이명박의 공정 사회 드립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사람이라도 하나 있으면 일단 뒤집어 엎고 보자, 이러고 힘이라도 몰아줄 텐데, 그럴 만한 사람도 없고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더 이상 그런 의지도 없는 거 같다는 얘길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보자, 구조를 바꿔보자 처럼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그림에 대해 뭘 해보겠다는 의지는 없다는 거다. 그 대신, 덜 간섭 받고 대신 다른 사람도 신경 안 쓰고 더 편하게 사는 자족적이고 개인적인 삶에 훨씬 공을 들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좋은 각하와 나쁜 사장/나쁜 각하와 좋은 사장의 조합이 있다면 망설임없이 두 번째 조합을 고른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옳다, 그르다(어떻게 그걸 무슨 근거로 판단하겠나) 그런 생각보다는 어쨌든 세상과 사람들은 바뀌었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그렇다면 혁명이든 변화든, 그 바뀐 세상과 사람을 전제로 기획되고 실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물론, 변화가 누군가의 기획과 실행으로 이뤄지는 건 아닐 테지만) 제러미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을 읽는 동안 저자가 주장하는 '유러피언 드림'이 우리가 도달해야 할 이상향이라면, 그걸 만들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우리가 상정한 어떤 행위자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바로 그런 개인들일 거다 싶었다. 그러니까, 위에 인용한 말 가운데 유러피언 드림이 저런 시련에 견딜 수 있을까하고 묻기 보다 그 이상을 추구할 각 개인들이 위에 열거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과연 끝까지 그 이상향을 버리지 않을 만큼 강할까 라고 물어야 하지 않을까.

 

리프킨의 주장은 간단하다. 개인의 자율성을 추구해온 근대 정신이 아메리카 드림으로 꽃피어 근대의 업적(?)을 이뤘다면, 이제 그것은 유러피언 드림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거다. 그게 지금 상황에 알맞고 차세대 인류 여정에 훨씬 적합한 꿈이라는 것. 그가 말하는 유러피언 드림은 "개인의 자유보다 공동체 내의 관계를 동화보다는 문화적 다양성을, 부의 축적보다 삶의 질을, 무제한적 발전보다 환경 보존을 염두에 둔 지속 가능한 개발을, 무자비한 노력보다 온전함을 느낄 수 있는 "심오한 놀이deep play(완전한 몰입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닫고 희열을 느낄 수 잇는 활동)를, 재산권보다 보편적 인권과 자연의 권리를, 일방적 무력 행사보다 다원적 협력을 강조한다."(12) 리프킨은 아메리카 드림이 무엇이었고, 그것이 태동한 것은 어떤 시대적, 역사적 맥락에서였고,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이뤘는지, 그리고 마침내 어떻게 위기에 봉착했는지를 보여준다. 그와 함께 유러피언 드림은 어떤 바탕에서 생성됐고, 그것은 과연 무엇이고 어떻게 실현되려고 하는지 등을 설명한다. 그는 아메리카 드림을 탄생을 토머스 제퍼슨의 '미국 독립 선언문'에서 감지한다. 바로 "모든 인간은 삶과 자유뿐만 아니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양도 불가의 권리를 가졌다"는 구절. 이 구절에서 프랭클린은 행복이 끊임없는 개인적 진보, 즉 자신의 삶에서 무엇인가를 이뤄내는 것에 의해 얻어진다고 믿었다. 이러한 신념은 청교도적인 자제와 근면을 바탕으로, 미국에서 효율성과 생산성으로 구현되었다.

 

근대를 지배한 자본주의와 민족국가는 모두 거기서 나와 비교적 전통의 굴레와 상충되는 이해 관계에서 자유로웠던 미국에서 활짝 꽃피었다. 하지만 지금은 복잡성과 상호의존도가 높아지는 글로벌 경제 시대다. 이런 상황에서는 배타적인 자기 이익과 개인적인 모험보다는 취약성을 분산하고 리스크를 분담하는 데서 기회가 행긴다. 즉, 신뢰, 호혜, 협력이 독자적이고 거친 개인주의와 적대적 행동보다 더 중요한 생존 가치가 된다. 이 설명을 하면서 벨기에의 물리화학자 일리야 프리고지네의 '소산 구조 이론'을 들고 나왔다. 소산 구조 이론은 모든 생명체와 비생명체는 스스로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 재조직을 통해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인 구조가 된다는 것인데, 지금의 글로벌 경제가 바로 대표적인 예라는 것이다.(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가 떠오른 대목이었다. 또 그런 변화 이면에 피드백 회로를 갖춘 '인텔리전트' 정보 및 통신 기기가 개발되는 기술의 변화도 있다) 유러피언 드림은 바로 그 신뢰, 호혜, 협력의 구현이기에 지금 상황에 적합하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그러면서 그 구체적인 예로 든 것이 유럽연합(EU). 리프킨은 유럽연합이 추구하는 이상과 그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어떤 행보를 이어왔는지 꼼꼼하게 추적한다.

 

유럽연합이 경제공동체를 넘어선 정체(政體)라는 것이 가장 큰 이슈. 그런데, 이 정체는 기존 민족국가와는 완전히 다르다. 유럽연합의 통치는 의사소통의 흐름을 관리할 뿐이며, 행위자들은 상호 교류하는 다수의 네트워크에 깊숙이 박혀있는 각 전략 지점에 위치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모든 의사 결정과 행위가 해당 네트워크뿐만 아니라 그 너머에까지 전달된다. 바로 네트워크 통치인 것이다. 이것을 중세적인 통치 시스템과 비교해 '새로운 중세'-중세세계에서 공간은 영토보다는 서로간의 관계에 기초했으며 경계선이 분명하다기보다는 투과성이 더 강했다.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을 구분하는 경계가 훨씬 적었으며 인간의 활동은 서로 중복되는 복잡한 관계로 얽혀 있었다(342) - 라고도 하는데, 특정한 물리적 공간의 지배가 아니라 제휴와 연결성을 중시하는 것이다. 울리히 벡은 "유럽연합은 무대를 설치하고 대화를 유도하며 쇼를 감독하는 교섭정부"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유럽연합은 그 자체가 '과정'인 것이다. 유럽식 정치란 사람들과 조직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공식, 비공식 네트워크를 통해 참여하는 의도적인 활동 전부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그러한 활동을 통해 지향하는 건 뭘까. 바로 사회 결속과 복지, 즉, 개인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더 큰 공동사회의 선을 극대화하여 자신의 복지를 증진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민족국가가 재산권을 보호하고 시장의 힘을 지리적으로 활장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만드는 임무를 맡았던 것과 비교된다. 그래서 이들은 영토를 기초로 한 의무와 재산권에서 탈피해 세계 전체의 집단 참여에 기초한 의무와 보편적인 인권을 구심점으로 삼는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인간의 연약함과 취약성,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연민이 그 기초가 될 것이라고 케임브리지의 정치학자 브라이언 터너는 주장한다. 그는 인간이 탐욕이 아니라 고난의 공동체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단결하게 된다고 믿었다. 인간의 삶과 역사는 더 넓고 포괄적인 영역으로 공감을 확대해온 과정이라는 것이다. 홉스의 세계관처럼 인간은 본래 탐욕스럽고 이기적이어서 정치적 장치가 필요했던 게 아니라 늘 마음이 열려있고 취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편적 인권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인류의 인류에 대한 보편적 권리와 의무는 보편적인 위협의 등장에서 비롯되었다. 2차 대전 후 뉘른베르크 재판은 그 예가 될 것이다. 이 재판을 관장한 국제군사재판의 조례는 주권 국가를 초월하는 도덕적 공동체에서 권리와 의무를 인정한 최초의 다자간 협정이었다.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부인하는 명령에 따르지 않을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것을 확인시킨 이 협정 이후, 인권의 시대가 열렸다.

 

유엔이 1948년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한 이후, 같은 해 '대량 학살 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 1949년에는 국제노동기구가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에 대한 협약'을 채택했고, 1951년에는 유엔이 '난민 지위에 관한 협정', 1957년 국제노동기구가 '강제 노동 철폐에 관한 협약과 원주민 및 종족 인구에 관한 협약', 1958년 국제노동기구는 '고용 및 직업 차별 금지 협약'을 채택했다. 1965년 유엔은 모든 종류의 인종 차별 철페에 관한 협약을 채택하고, 이듬해 시민 및 정치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과 경제, 사회, 문화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 두 건의 인권 관련 규약을 채택했다.(1976년 최종 승인) 이어 유엔은 1979년에 모든 형태의 여성 차별 철폐에 관한 협약 채택, 1984년 고문 및 잔혹하고 비인간적이거나 품위를 떨어뜨리는 대우나 처벌 방지에 관한 협약을 채택했다. 1986년에는 발전에 관한 권리 선언, 1989년에는 아동 권리 협약, 1993년에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이라는 직책이 공식 설립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권고사항일 뿐, 유엔은 이런 선언의 법적 구속력을 행사할 수 없다. 그런데, 바로 유럽연합이 그것을 구현하려 한 것이다. 유럽연합은 25개 회원국의 4억 5500만 인구에게 각 국가 영토의 제약을 받지 않으면서도 법적 구속력을 갖고 있는 정치 시스템이다. 유럽 인권협약이 유럽인권법원과 유럽법원을 통해 모든 유럽연합 시민들에게 보편적 인권을 보장하며, 그 인권은 전통적 국가가 부여하는 정치적 권리보다 우위에 선다. 여기에는 "삶의 질을 누리고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며 자연 세계와 지속 가능한 관계를 형성하고 다른 사람들과 평화롭게 사는 것 등 더욱 광대한 목표가 포함된다."(359) 이러한 유러피언 드림은 보편적 인권과 불가분의 관계로 보편적 인권은 그 꿈의 구현을 위한 행동규범이다.

 

보편적 인권의 구체적 내용은 어떤 것일까. 우선 사형문제. 유럽인들은 대량 학살을 포함해 극악무도한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다 해도 그 범인은 유럽연합의 공식 용어로 "양도할 수 없는 고유한 존엄성"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사형이 희생자 유가족의 고통을 보상해주는 적절한 방법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사형이 보상방법이 될 경우 사법 시스템은 불법적인 개인적 복수의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의 실질적인 위험에 어떻게 대처할 건가. 이를 위한 유럽의 외교 및 안보정책은 듣기에 따라서는 꿈이나 다를 바 없다. 그들은 영구적 평화(1795년, 칸트)를 꿈꾼다. 양차 대전의 발원지이자 피해지였던 유럽은 1648년 베스트팔렌 평화조약 이래 세력 균형의 원칙과 개별 국가의 패권 야욕을 전면 거부하는 것을 외교와 안보의 기조로 삼아왔다. 그러니까 그들의 꿈은 순진함이나 극단적 낙천주의의 환상에서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서 형제에게 가할 수 있는 잔혹한 행위에 대한 혐오감에서 태동했다. 이들은 안보 유지 능력을 보완하기 위한 정상회담(1999, 독일 쾰른)에서도 인도적 구호, 평화 유지, 위기 관리라는 세 가지 목표를 위해 유럽 안보 및 방위정책국(ESDP) 설립을 합의했다.

 

유럽연합은 또한 보편적 인권보다 큰 개념으로 생물권을 주장한다. 이에 따라 EU는 지구 환경에 대한 인류의 책임을 정치적 비전의 핵심으로 내세웠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이후, 모든 종류의 리스크가 이제는 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치며, 끝없이 계속될 수 있고 그 결과를 가늠하기 힘들 뿐 아니라 보상 대책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채택한 것이 바로 예방원칙. 어떤 행동과 유해한 결과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믿을 근거는 있다면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과학적 근거가 없더라도 미리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GM 식품에 대한 조치. 이는 눈앞에서 일어나는 개별 사건을 뛰어넘어 그 사건들이 전개되는 생태계 전체를 보게 한다. 계몽주의 과학이 모든 것을 분리하고 조각내어 분석함으로서 세상을 더 잘 알 수 있다고 믿었다면, 지금의 시스템적 사고방식에서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서로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존재한다고 믿는다. 다윈의 진화론은 한정된 자원을 차지하려는 개체들 사이의 투쟁에 중점을 두었지만 지금의 생태학은 각 개체들 사이의 공생관계로 파악한다. 가이아 이론이 말하듯, 각 개체의 적응과 진화는 더 큰 과정, 다시 말해 지구 자체의 적응과 진화의 일부인 것이다. 모든 생명체들 사이, 그리고 생명체와 지구화학적 과정 사이의 지속적 공생관계에 의해 '유기체로서의 지구'와 그 생물권에서 사는 개체들의 생존이 보장된다. 이런 인식에 따라 1997년 유럽연합은 암스테르담 조약에 동물 복지 규약을 첨부했다. 유럽연합 회원국들은 "자각적 존재로서 동물의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동물실험 대체, 초국경평화공원을 통한 생태계의 재결합)

 

저자는 유럽연합과 같은 정체가 아시아에서는 불가능할까 묻는다. 세계를 전체 맥락 속에서 파악하는 아시아의 철학이 오히려 이런 공동체의 출현에 더 맞지 않겠나 하지만 아시아인들의 사고는 또 너무 집단적이지 않은가 반문한다. 결국, 개인의 자유의지와 집단적 책임감 둘 다를 아우를 수 있는 유럽연합이 가장 적합하지 않겠느냐고. 그렇다면 이 유러피언 드림을 어떻게 인류의 보편적 꿈으로 만들 수 있을까. "우선 각 개인의 개인적 행동과 선택이 이 세상의 다른 존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활실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새로운 행동규범을 갖추어야 한다. 즉, 개인의 도덕성과 윤리를 보편화해야 한다. 시스템으로 연결된 이 세상에서 이제 더 이상 직접적인 나쁜 행위(hot evil)와 간접적인 나쁜 행위(cold evil)를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결국 인간에게 두 가지 반응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첫째는 특정활동이 가져오는 시스템 전체에 대한 해로운 결과가 인간 서로간 또는 지구에 대한 취약성과 책임의 공동인식으로 이어지는 것. 둘째는 재앙이 불러오는 두려움으로 피포위(被包圍) 의식과 생존 전쟁에서 자신만 보호하려는 사고방식이 더 강해지는 것. 여기서 저자는 제3의 길을 말한다. 그것은 둘의 통합이다. 통합과 상호 의존이라는 생명본능과 분리와 독립이라는 죽음 본능을 통합하는 것(프로이트가 등장한다). 포스트모던 시대는 개인의 정체성이 하부 정체성(sub-identity)과 거대 정체성(meta-identity)으로 분열하는 시대다. 이런 상황에서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면 사람들은 스스로를 하부 자아(sub-self)와 거대 자아(meta-self)로 나눠 주변의 모든 네트워크에 접속해 있어야 한다. 이런 다중인격, 자아의 분열로 우리는 진정한 자아를 잃게 될까. 아니면 오히려 글로벌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일종의 대처 메커니즘으로서 주변의 복잡하고 모호한 상황을 견딜 수 있게 될까.

 

문제는 이것이다. "극단적으로 분화된 포스트모던 인격체를 글로벌한 전체로 재통합할 방법이 있는가. 그럴 수 없다면 개인적 소외감이 존재적 두려움이 더욱 심해질 것이다. 이미 많은 젊은이들이 서로 더욱 연결되고 있지만 사실은 더욱 소외감이 커지고 있는 세계에서 그런 두려움을 경험하고 있다."(485)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의 이 연결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목표를 찾는 것이다. 네트워크 참여 증가, 멀티 태스크 수행 능력, 경제적, 사회적 환경적 상호 의존성에 대한 인식, 연결성과 포괄성의 추구, 상충되는 현실과 다문화 시각에 대한 관용성, 과정 지향적 행위 등이 우리를 시스템적 사고방식을 이끌 것이고, 이것을 간접적 나쁜 행위를 막고 지구의 생명 유지 체제를 구성하는 많은 네트워크 관계를 조화시키는 새로운 글로벌 윤리에 활용할 수만 있다면, 통합이라는 인간 의식의 3단계로 발전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성공여부는 재참여와 재결합의 깊이에 달려 있다. 즉, 다른 존재와의 진정한 교류, 직접적인 접촉이 필요하다. "직접적인 접촉이 없다면 공감은 불가능하다. 새로운 글로벌화 기술은 실제로 공간과 시간을 압축해 인류를 더욱 밀접한 상호 의존적 관계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가 소속된 더 큰 시스템을 구성하는 많은 관계를 더 잘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인식이 자연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재참여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인간 의식의 새로운 단계로의 발돋움은 실패로 끝날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관계 중심적 자아는 진정한 인간성이라기보다는 기술적인 성격을 띠게 되고, 죽음 본능을 맹신하는 해묵은 의식 단계만 연장시키게 될 것이다. 생명 본능은 우리 주위에 있는 다른 존재의 삶에 깊이 참여함으로써 되찾아질 수 있다."(487-488)

 

제러미 리프킨은 마지막에 늘 개인으로 돌아선다. 유럽연합이 인류의 꿈을 법제화하고, 조약에 서명하고, 실무그룹을 구성하고, 기준을 만들 수 있지만 이 새로운 여정에 필히 수반될 폭풍을 견뎌내려면 개인적 책임 의식이 필요하다고. 유럽인들을 비롯한 인류가 포괄성, 다양성, 삶의 질, 심오한 놀이, 지속 가능성, 보편적 인권, 자연의 권리, 지구상의 평화를 구현할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유럽인들의 집단 책임 의식과 더불어 미국인들(아메리카 드림)의 낙관과 개인적 책임이 필요하다고. 우리가 과연 이것을 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