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인간에게는 말의 완전성이 필요치 않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열면서 저자는 이 두 문장을 먼저 내세웠다. 저자도 이것의 모호함에 대해 인정하고, 고귀한 것은 드물고도 어렵다고 앞으로 갈 길의 험난함을 예고한다. 그가 가장 먼저 꺼내든 개념은 바로 “적합한 원인”이다. 스피노자는 에티카 3부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원인의 결과가 그 원인에 의해 명석하고 판명하게 지각될 수 있을 때, 나는 이 원인을 적합한 원인이라고 한다.” 적합한 원인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외부의 것을 사랑할 때 우리는 그것에 좌우된다. 우리 자신이 바로 그 감정의 적합한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을 적합한 원인으로 만들 수 있을까.
능동성을 통한다면 가능하다. 그에 대해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내면이나 외부에서 우리 자신이 적합한 원인이 되는 뭔가 일어날 때, 다시 말해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그 자체만으로 명석하고 판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뭔가가 우리의 내면이나 외부에서 일어날 때 나는 우리가 능동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 자신이 단지 부분적인 원인에 불과한 어떤 것이 우리의 내부 또는 우리의 본성에 생길 때, 나는 우리가 수동적이라고 말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첫눈에 반하기는 수동적 행위다. 우리에게 충격을 가하는 외부의 무언가를 수동적으로 감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능동성이 다른 철학자와 다른 것은 그가 신체와 정신의 평행관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게 감정은 신체의 감정작용뿐 아니라 그 감정작용에 대한 관념까지 포함한 것이다. 즉 신체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정신에서도 똑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어떻게 하면 더 자유로울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면 스피노자는 어떻게 하면 더 능동적인 인간이 될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적합한 원인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것은 신체와 정신을 동시에 고려한다.
어떤 것이 부적합한 원인이고, 어떤 것이 적합한 원인인가. 적합한 생각은 명석하고 판명하다. 신체와 정신이 평행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본 스피노자는 명석하고 판명한 생각에 이르기 위해 신체적 감정작용들을 변화시킬 것을 제안한다. 질투는 사랑에서 시작해 증오 속에서 자취를 감춘다. 감정의 이런 변화를 보면, 결국 어떤 행동은 그 자체로서 나쁘지도, 좋지도 않다. 사랑은 증오가 될 수 있고, 증오가 사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떤 행위가 단지 그 자체의 고유한 힘, 고유한 완전성을 표출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의 덕목이다. 문제는 서로 대면하는 신체적인 힘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적합하냐, 부적합하냐가 문제다. 오직 윤리적인 근거에 따라 나에게 좋거나 나쁜 것을 추구한다면 악은 저절로 사라질 거라는 게 스피노자의 생각이다. 나에게 좋은 것을 추구하는 한, 악은 없다. 그러므로 애초에 “이 우주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다.”
이런 관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 자신을 규정해주는 것 역시 우리가 타인과 맺는 적합하거나 부적합한 관계들이다. 그것이 개인을 개별적으로 만들어준다. 그러니 우리가 속한 종은 잊어야 한다. 경험하는 것, 그것은 만나는 것이고 그 만남은 좋거나 나쁘다. 인간은 오직 만남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다. 우리가 외부의 무언가를 만날 수 있는 까닭은 내부에 무언가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이미 어떤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남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한다.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자면, “각 존재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가지는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것은 외부와의 관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 운동과 정지의 관계, 이 관계가 적합하게 이루어질 때 우리는 더 잘 존재하게 된다. 더 잘 존재하는지를 어떻게 아느냐고? 기쁨을 느끼는지 보면 된다. 스피노자의 기쁨은 “가장 작은 완전함에서 더 큰 완전함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인생은 간단하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만으로 구성되면 된다. 하지만 또한 인생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관계를 재구성하는데, 이 과정에서 한 차원에서는 적합한 것이 다른 차원에서 부적합한 것이 되곤 하기 때문이다. 인생이 복잡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쁘다는 조건에서만 자신에게 좋은 것’에서 벗어나야 하고, 이것이 인생의 어려운 대목이다.
그리고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스피노자의 육체는 정신과 평행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내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증오라는 감정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증오가 상대방에게 해를 입힘과 동시에 우리 자신에게 해를 입히기 때문에 나쁜 것이다. 이 관계의 변화가 너무 심하면 생존이 불가능해지는 단계에 이른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인간의 신체가 오직 시체로 변한 경우만 죽었다고 인정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한다. 명확하게 나타나는 변화 역시 하나의 죽음으로 간주할 수 있다. 어른이 되면 아이는 부모의 기억 속 외에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데, 이런 것도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각 부분 사이의 운동과 정지 관계로 정의하는 것은 인간과 동물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영향을 주고 받는 능력이라면 그게 인간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존재든, 서로 닮거나 다르거나 간에, 각자 갖고 있는 고유한 완전성만이 그를 개별자로 만들어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웃의 완전성을 곁눈질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인간에게는 말의 완전성이 필요치 않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은 나 자신의 고유한 완전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발전시킬 것인가다. 또한 어떤 만남을 통해 우리 자신의 힘을 키울 수 있을까. 그게 전부다.
모방은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와 유사하지만 우리가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았던 것이 어떤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고 상상한다면, 우리는 그로 인해 그와 유사한 감정에 사로잡힐 것이다.” (에티카 제2부 정리 27) 동일한 감정을 느끼기 위해 상대방을 사랑할 필요는 없다. 단지, 우리와 유사한 것이 느낄 감정을 상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러한 감정의 모방이 슬픔과 관계되면 그게 바로 연민이다. 그래서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를 증오하는 사람에게서도 슬픔을 느낄 수 있고, 우리와 유사한 자인 그들의 슬픔은 곧 나의 슬픔이 되어 동정심을 느끼게 된다.
상상은 중요하다. 정신은 무력할 수 없으며 본래 강력하다. 정신은 이해하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유없는 슬픔은 정신이 자신의 무능력을 상상할 때, 생겨난다. 여기에 타인의 비난을 상상하면 그 슬픔은 실제가 된다. 그렇다면 기쁨은 정확하게 그 반대다. “정신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동 능력을 고려할 때 기쁨을 느끼며, 자기 자신과 더부렁 자신의 행동능력을 더 명확히 상상할수록 더 큰 기쁨을 느낀다.” “아울러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을 상상할수록 우리의 기쁨은 더 커진다. (에티카 제 3부 정리 53) 그러니 행복하게 사는 법은 간단하다. 슬픔의 소용돌이가 아니라 자신의 행동 능력과 고유한 완전성을 고려함으로써 긍정적인 나선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긍정적인 나선을 작동시킬 수 있을까. 많은 것을 느끼고 다양한 것들과 만나고 적합한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면 신체의 감정 작용은 정신이 생각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신체에 더 많은 감정작용이 기능할수록 정신의 생각들이 더 풍부해진다. ‘정신은 신체와 평행하다.’ 영화는 이러한 감정의 모방에 유용한 도구다. (내 생각엔 문학도) 영화는 우리와 유사한 것들과 실제로 대면하지 않고도 그 ‘유사한 존재’가 느끼는 감정과 교류할 수 있다는 이점을 제공해준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의 모방은 결과적으로 감정의 실재성을 낳는다.
데카르트가 모든 신체 행위는 정신의 어떤 정념으로서 표출된 것이므로, 정신은 우선 신체의 결과물인 생각들을 표현하며 신체를 수동적으로 따른다면, 스피노자는 한 발 더 나아간다. 모든 신체 행위는 정신의 어떤 행위에 상응하기 때문에 신체가 능동적일수록 정신도 능동적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설사 슬픈 정념이라 해도 허구에서 정념을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지적인 기쁨이 생겨나게 한다고 밝힌 데서 그치지만 스피노자는 정신은 이해를 통해 항상 기쁨을 느끼는 한편 슬픈 정념이 상상의 존재들과 결부되어 있는 한 인간은 상상하는 능력을 그런 식으로 행사하면서 기쁨을 느낀다는 것까지 덧붙인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존엄하게 만드는 것은 의지, 자유라고 했다. 그런데, 모방이라니.. 감정의 모방과 욕망의 모방은 어떻게 다를까. 감정의 모방이 슬픔과 관련되면 그건 연민이 되지만 욕망과 관련되면 그것은 경쟁심이 된다. 다른 누군가가 욕망하는 물건을 얻었을 때의 기쁨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나도 그것에서 기쁨을 느끼고 싶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라면? 결국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한 것에서 다른 사람이 기쁨을 느끼지 못하도록 결국 그것을 파괴할 것이다.
대량 생산은 이러한 경쟁심을 감소시킴으로써 문제를 완화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악을 피하기 위한 선은 이성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이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그 원동력이 경쟁심인 사회는 노예들의 사회다. 우리는 어떤 것이 좋아서 그것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욕망하기 때문에 좋아진다. 우리의 욕망이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자신이 기쁨의 원인이 되지 못하고 외부의 원인에서 우리의 구원을 기대하게 되면 우리는 노예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오로지 우리 자신이 그 자체로 이미 완전하다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에게 진정으로 적합한 것, 다시 말해 그의 기쁨과 힘을 증가시켜주는 것을 욕망할 수 있게 된다. 그것에 과연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까.
스피노자가 얻고자 한 것도 바로 그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낟. “평범한 삶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사건들은 모두 헛되고 부질없는 짓들이고 우리가 두려워하는 모든 대상은 그 자체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며, 정신이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만큼만 좋거나 나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나는 경험을 통해 배웠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인간에게 널리 전염될 수 있는 진정한 선, 정신이 다른 모든 선을 거부한 후에 오직 정신을 완전히 채울 수 있는 선, 한마디로 정신이 찾아내 소유하면 영원성과 지복을 주는 선이 존재하는지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오, 놀라워라. 난 이제부터 스피노자빠가 될 테다.
하지만 개개인에게 자신만의 존재양식이 있다. 보편적인 기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한 개인의 본질이 또 다른 개인의 본질과 다른 만큼, 한 개인의 모든 감정은 또 다른 개인과 다르다.”(에티카 제3부 정리 27) 우리를 개별적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은 그것을 행하는 방식이다. 각자에게는 자기만의 고유한 완전성이 있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자유와 의지, 그것과 만난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최고의 선은 누구든 접할 수 있으며 누구에게도 금지되어 있지 않다. 각자에게는 자신만의 고유의 완전성을 이해하고 만족에 다다를 자유가 있다. 우리는 각기 다르지만 만족하는 방법은 다 같다. 바로 자기 자신이 되는 것. 말은 쉽다!
다음을 가르쳐주시지요, 스피노자 선생.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희망을 포기하라고. 엥? 이건 무슨 말. 희망이야말로 궁극의 기쁨이 아닌가. 그러나 스피노자는 말한다. 희망은 두 가지 면에서 슬픔의 정념이라고. 하나는 희망이 언제나 두려움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희망한다는 말은 동시에 그것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희망은 어떤 상상의 생각에 의해 결정된다.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단지 상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희망을 포기하는 것은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환멸로부터 동시에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을 얻는 것이며 현실에서 기쁨을 얻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상상은 그만! 상상을 멈추고 사유를 시작해야 한다. 자신의 고유한 완전성을 이해하기 위해 정신을 훈련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슬픔에서 치유되어 능동적이 되고 즐거워진다.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이성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가 원하는 만큼. 언어는 그 도구이고, 언어는 오로지 공유를 통해 의미를 갖는다. 인간 존재의 역설은 여기서도 비롯된다. 우리는 보편적인 것에 다다를수록 개별적이고 되고, 우리는 오직 모두와 함께 공유하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개인이 되고, 개별적이고 능동적이 된다. 인간은 생각하지만 들뢰즈의 말처럼 생각하기 시작하는 즉시 자기기 원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필연적인 것, 참된 것, 보편적인 것을 생각한다.
이제 우리는 철학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에 도달한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칸트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세 가지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한다고 했다. 첫째, 나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할까.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을까. 의지가 강조된 데카르트의 인간은 현재의 자신보다 앞으로 어떻게 되리라고 결심하는 미래의 자신에 더 가깝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현재의 자신에 더 집중한다. 스피노자의 인간은 그 존재 자체에 의해, 존재의 만남들을 통해, 그 만남이 불러일으킨 적합하거나 부적합한 관계들을 통해 개인을 정의한다. 많은 것을 느낄 수 있고 다양한 것들을 만나 적합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때 우리의 신체와 정신의 능력은 동시에 발달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것은 계속 존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것은 욕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욕망은 분명한 동시에 모호하다. 우리가 계속 존재하기를 욕망한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도 추구한다는 점은 모호하다. 스피노자에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노력이 정신에만 관여하 ㄹ때 그것을 의지라 부르지만 그 노력이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될 때 그것을 욕구라고 부른다고.
그렇다면 욕구는 인간의 본질 자체일 뿐이다. 욕구는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적합한 것을 저절로 지향하기 때문이다. 이 욕구에 의식이 수반되어야 비로소 욕망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것이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려고 노력하고 원하며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고 원하며 욕구나 욕망에 따라 지향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한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의식하기 전에 먼저 지향한다. 지향이 생기기 전에 대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이전에 사물이,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 내적 필연성 이전에 외적 필연성이라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에게서 죽음의 문제도 간단히 해결된다. 인간은 죽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다. 지속되기를 욕망하는 것이 바로 존재 자체이기 때문이다 – 지속되고 싶은 가혹한(본질적이고 질기고 양도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욕망. 그러므로 “어떤 외부 원인 때문이 아니라면 어떤 것도 파괴될 수 없다.”(에티카 3부 정리 4) 우리가 죽는 이유는 죽음이 우리의 일부이기 때문이 아니라 외부 요인들이 우리를 마모시키고 약화시킴으로써 삶에서 내몰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늘 다른 삶을 원한다. 자연의 본질은 다른 것. 그러므로 다른 것과 같아지려고 하는 것은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다. 죽지 않고 변화하는 방법은 형태를 바꾸는 게 아니라 자신의 형태를 발전시키는 것이며,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해 자신을 억누르거나 왜곡하지 않고 더 즐거워지기 위해 자신의 완전함을 이해해야 한다.
삶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며 결국 인간을 자멸로 이끈다. 그러므로 유일한 해결책은 현재의 자신이 되면 된다. 변화를 욕망하지 않고 눈을 뜰 것. 눈을 떠서 자기 앞의 현실을 직시하고 슬픈 정념인 희망을 포기하고 이성을 되찾을 것.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여기서 상상은 감정의 모방 외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상상을 잘 쓸 수 있을까. 흔히 영화 속 폭력은 현실에서의 폭력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하지만 악덕은 상상력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상상력은 생산적인 힘이며 긍정적이고 실제적인 힘이다. 하지만 자신이 상상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게 문제다. 즉 불완전한 이성이 문제인 것이다.
꿈, 혹은 상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존재하는 것. 이것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한 상상은 언제나 유용하다. 스피노자는 말한다. “정신의 상상은 그 자체로 보면 아무런 오류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인간이 지각하는 한 아무것도 긍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부정한다.”(에티카 2부 정리 49) 여기서 자유가 등장한다. 사유하는 이해력과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의지. 이해력이 무엇을 생각하든, 무한한 의지는 그것을 부인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의 ‘생각한다’는 반드시 그것을 생각하는 동시에 적어도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추가되지 않는 한 그것이 현실적으로 존재함을 긍정하는 것.
상상은 현존하는 존재를 긍정할 수 있을 뿐아니라 과거와 미래도 관련된다. 인간이 떤 것의 이미지에 영향을 받는 동안만은 비록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현존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신체는 그것의 존재를 배제하는 그 어떤 감정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감정은 오로지 우리 내면에만 존재한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참된 관념이다. “참된 관념을 생각하면 우리 존재는 고양되고 힘을 얻는다. 어떤 생각이 적합해질 때, 그것은 우리의 행동, 생존 능력, 확증된 정신의 생명력이다. 이해하는 것은 정신 고유의 완전성이기 때문이다. 어떤 생각이 완전해지는 순간, 그 생각이 정념을 행동으로 바꾼다. 하나의 생각은 하나의 행동이다. 정신이 그 생각을 완전히 긍정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완전하고 적합하며, 그 생각에 외부의 것은 전혀 없다. 이해하는 것은 언제나 기쁨을 준다. …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한 우리는 행동하며 또 살아 있다.”(415-416)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불완전하다. 무엇보다 시간 앞에서. 시간은 인간의 무능함의 표지이다. 죽는다면 우리는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살아있는 상태에서 시간을 벗어날 수는 없을까. 정념의 시간은 선택되지 않은 변속. 수동적으로 감내하는 시간. 우리는 행동을 통해서 세상의 속도를 지연시키고 일어나는 일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인생은 항상 우리에게서 달아난다. 인생은 지나간다. 그것은 절망이다. 그래서 니체의 영원 회귀는 인간의 영원한 로망이다. 그러나 영원회귀는 똑같은 순간을 영원히 다시 사는 게 아니라 선택의 원리에 의해 매순간 무한히 다시 살듯이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현재를 영원 회귀의 방식으로 산다는 것은 현재를 진짜로 다시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를 매우 강렬하고 긍정적으로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하며, 그럴 때 현재는 초자연적인 광휘로 빛납니다. 인생은 영원하다고 말할 수 있다. 스스로 그 순간을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능동적이고 긍정적일 때 비로소 영원성이라는 관점에 다다를 수 있다.”(433) 왜 추억을 되살리는 것은 완전하지 않을까. 의존성이 문제다. 추억이 불러일으킨 기쁨에는 즉각 슬픔이 뒤따른다. 추억은 더 이상 현재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극도의 상실감을 일깨운다.
자, 이제 결론이다. 잃어버린 과거를 슬프게 되살고자 고집하기보다는 지금 즐겁게 살면서 현재의 순간들을 영원한 것으로 만드는 거다. 즉, 우리의 영원성, 우리 자신의 완전성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능동적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삶의 순간들이다. 영원성은 무한히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사는 것이다. 우리는 정신이 됨으로써 시간과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정신이 된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고, 이해한다는 것은 완전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기쁨을 증가시킨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인식은 세 가지다. 하나는 우리가 그 원인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의미에서 우리 자신이 적합한 원인이 될 수 없는 간접 인식. 생일이나 지리 같은 것. 두번째 인식은 과학. 우리 스스로 능동적으로 인식을 만들어내 인식하는 것. 이러한 인식은 필연성을 따른다. 세번째 인식은 직관. 바로 두번째 인식을 체화한 것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순간에 완전히 현존하는 것이다. 그것은 느끼는 것. 인간은 “자신의 필연성과 자신의 개별적인 완전성을 이해하고 싶어 한다. 인간은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를 이해하고 싶어 한다. 인간은 모든 것을 지각하고 경험하기를 원한다. 우리가 어떤 증명을 이해하는 것처럼 단순히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증명 없이 직관적으로, 내부로부터 이해하고 싶어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그 모든 것을 느끼고 싶어 한다… 단지 아는 게 아니라 느끼고 싶은 것, 덜 알고 더 많이 느끼는 것.”(451)
인간이 이성을 찾아 타인과 관계를 맺는 동시에 개별적인 인간이 되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데카르트의 의지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어려운 것은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을 체화하는 것이다. 자신의 힘을 이해함으로써 더 이상 슬픈 정념을 수동적으로 감내하지 않아도 된다. 인간은 생각을, 이성을 통해 기쁨의 적합한 원인이 되고 스스로 그 기쁨을 만들어내고 자신에게서 고갈되지 않는 기쁨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랑이다. 증오를 이기는 유일한 방법, 사랑.
하지만 어떻게 거기에 이를 수 있을까. 세계는 우리에게 늘 저항하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 내면이나 외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적합한 원인이 될 수 없는데… 우리는 어떻게 영원성에 이를 수 있을까. 우리 삶에서 어떻게 무한한 기쁨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알랭은 이렇게 말한다. “각자에게는 영원한 것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바로 그 자신이다. 자기 자신으로 있는 행복한 순간들, 그가 존재 속에 완전히 표출되는 그 행복한 순간들 속에서 사물과 사람의 행복한 경합을 통해 그에게 고유한 힘을 포착하려 해보라. 바보들은 행복이 외부에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현자는 아마도 자기 힘의 순간에 그가 분명히 자기 자신임을 알 것이다. 괴테는 “모든 인간은 현재 속에서만 영원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매순간은 영원하고 아름답다. 우리 각자는 지속과 무관한 갑작스러운 행복을 체험한 적이 있다.” 영원은 무한한 지속이 아니라 존재의 무한한 향유다.
스피노자의 모든 주장은 일종의 본질의 순간성에 기초를 둔다. 매순간 존재의 본질은 정확히 존재하는 그대로이며, 그 존재는 존재하는 한 완벽하다. 우리가 뭔가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재가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이런 상상은 슬픔이 태어나게 한다. 우리의 조건이 어떠하든, 현재의 완전함을 생각하는 것이 힘과 기쁨을 증가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존재에는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존재를 향유하는 데는 한계가 없다.
스피노자는 생계를 위해서 광학 렌즈를 깎으며 증명을 하면서 살았다는데, 당대에 위험한 철학자로 살해 위협을 받기도 했단다. 칼 자국이 남은 겉옷을 보존하기도 했단다. 자연 혹은 신이란 지금 존재하는 것의 총체, 뭔가가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드는 원리들의 총체라고 했다니,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모든 존재에게는 각자의 완전성이 있다, 우리가 영원히 존재하는 길은 그 완전성을 이해하고 매순간 그것을 구현하는 것이라는 그의 철학은 어쩐지 모든 인간에게는 불성이 있으며 그 불성을 발견하는 것만이 궁극의 해탈이라고 말하는 부처의 가르침과 닮았다. 이웃의 완전성을 곁눈질할 거 없다는 말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가르침과 닮았고. 기쁨의 철학자 스피노자. 그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