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스튜디오 필로, 철학이 젊음에 답하다 : 데카르트 편

양화 2010. 7. 28. 04:14

인터넷이 되는 컴퓨터는 한글이 안 되고 한글이 되는 컴퓨터에서는 인터넷이 안되고...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다. 암튼 최근 읽은 책의 내용을 요약 정리함. 너무 길어 두 편으로 잘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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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우리의 삶에 답을 줄 수 있을까. 아니, 우리가 철학을 통해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게다가 철학은 늘  사후적이다. 삶에 뒤따라오는 것이지, 삶 전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러니 철학의 효용은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거나 더 가치있는 삶을 살고 싶다거나 같은 삶의 기획단계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살아온 삶을 검증하는 데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스물 무렵의 철학이 그저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것이 목표인 공부의 대상이라면 마흔이 넘어가면서는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해설서나 주석으로 더 유용한 듯 싶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해설서를 읽으면서 이제서야 재미를 느낀 것도 뭔지 모르고 살아온 지난 삶에 대한 뒤늦게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마음 한 구석에 돌진해 흔적을 남긴 수많은 경구들도 좋았고, 새삼 아, 인생이란 게 이런 것이었구나, 사람이라는 게 이런 존재였구나  하면서 살아가야 할 날이 아직 좀 더 남아 있다는 것이 기뻤다. 데카르트의 첫 번째 장은 이런 물음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모르는 상태에서도 선택할 수 있는가?” 대답은 “그렇다.”이다. 삶이 무수한 선택의 순간을 우리 앞에 내놓는 것이고, 한 인간의 삶은 그런 순간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 문제인지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모르면서도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다. 심지어 데카르트는 우유부단함이 가장 나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최선은 잘 알고 올바른 것을 선택하는 것일 게다. 그런데, 그 안다는 것. 그게 문제다. 인간의 알 수 있지만 그 이해력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이러한 “유한한 이해력과 무한한 의지 사이의 불균형”은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의 근원이지만 한편으로는 위대함의 근원이기도 하다. 무한한 의지가 인간에게 신이 차원을 열어준다. 바로 욕망의 차원에서. 인간은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지만 모든 것을 욕망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게 어떻게 고뇌의 근원이 되지 않고 위대함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걸까. 선택이라는 것에는 늘 포기가 따른다. 그것은 우리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 모든 것을 욕망하지만 모든 것을 이룰 수 없다는 것, 어떤 것을 선택하는 순간, 어떤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 그런데, 데카르트는 그것이 바로 인간이 가진 자유의 표시라고 말한다. 그 자유는 수동적으로 주어진 패에서 골라 가지는 것에서 나아가 가능성을 발명해내는 데까지 나가는데, 그게 바로 위대함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즉, “선택이란 우리의 의지 없이는 존재하지 않을 행위들을 실행하는 것”이다. “인간들은 욕망과 비례해서 존재”하며 욕망할수록 더 분명하고 명확하게 존재한다. 여기에 의지가 작용한다면 더 실제적인 존재가 된다.

 

데카르트는 단언한다. 인간의 존엄성은 지적 능력이 아니라 의지에서 기인한다고. 포레스트 검프는 그가 가진 이해력의 결함으로 인간이 가진 의지의 무한성이 더 크게 부각된다. 우리는 이미 선택할 정도로는 충분히 알고 있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양식(養識)은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저마다 양식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생각해서 다른 것들에는 좀처럼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들도 양식에 대해서만큼은 현재보다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은 의지의 무한함에도 있지만 자기 한계에 대한 분명한 인식에서도 나온다. 이해력이 없는 인간의 선택과 행동은 그저 욕망으로 강등될 따름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했을 때, 그것은 욕망 이상의 의지가 된다. 그러기 위해서 생각이 필요하다. 생각이란 건, “오직 우리가 그것에게 자리를 내어줌에 따라 존재하는 우리 내면의 타자”다. 플라톤은 “생각이란 바로 그 타자와의 말없는 영혼의 대화”라고 했다. 하지만 생각은 우리 내면에서 저절로 이루어지고 우리 없이도 행해질 수 있는 기계적인 활동이 아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믿음과 용기, 그리고 의지가 다시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유할 수 있을까. 데카르트에 따르면 네 가지면 충분하다고 한다. 물론 그 전에 그 네 원칙을 단 한 번도 어기지 않고 지키겠노라 확고하고 변함없이 결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따라 붙는다. 첫 번째 원칙은 명석성과 판명성.  아주 쉽고 분명해서 자기가 아는 것에 대해 어떤 의심도 남아있지 않은 개념. 여기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성의 빛’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데카르트적 직관, 명석(모호하지 않은 것)하고 판명한(혼란스럽지 않은 것) 개념에 이르기 위해서는 탐색과 연구, 초점을 맞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선 전체는 명료하지만 세부는 혼란스러운, 혼란스러운 명석함이 있다. 어떻게 이 혼란을 벗어날까. 순수하고 주의깊은 정신의 확고한 이해를 위해 어떻게 진실을 추구해야 할까.

 

바로 분할. 복잡한 것을 분해하여 간단한 요소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 다음 세번째 원칙이 나온다. 바로 순서 정하기.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으로 생각에 따른 순서를 고안해내는 것이다. 이게 바로 데카르트의 연역이다. “각각의 것들을 명석하게 직관하는 연속적이고 부단한 사유활동을 통해, 확실하게 인식된 것들로부터 필연적으로 결론이 내려지는 모든 것을 이해하는 작업” . 네 번째 원칙은 열거다. “내가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기 위해 어떠한 경우라도 전체적으로 열거하고 일반적으로 검열을 실시하는 것” (푸리올은 영화의 여러 기법들이 데카르트의 방법론과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초점의 변화, 줌, 컷 분할, 수평이동)

 

데카르트는 확언한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인간은 오로지 원하기만, 욕망하기만 하면 된다고. 자, 이제 철학이 시작될 참이다. 그런데, 철학의 시작은 “가장 어둡고 모호한 것에 의한 명석성”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로 돌아간다. “너 자신을 알라”. 때로 데카르트는 질서 강박증으로 오해받지만 질서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질서가 선행되어야 하고, 가장 확실한 것부터 의심해야 한다. 오로지 보잘 것 없는 사람만이 확신으로 무장하고 있는 법이니까.

 

자, 이제 시작이다. 행동의 비결은 시작하는 것, 그리고 의지의 비결은 욕망하는 것. 우리는 욕망하고, 마침내 시작한다. 가장 확실해 보이는 것을 의심하는 방법적 회의, 궁극적 회의를 통해 우리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 만큼은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을 유일하고도 절대적 진리로 만난다. 생각하는 존재의 탄생이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자명한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 모든 지식을 철저히 의심해야 하며 외적 사물의 세계에 대한 판단을 유보함으로써 우리의 시각을 변경하고 사실 그 자체를 아무런 전제없이 보는 판단중지, 혹은 괄호치기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과 존재는 분리된 채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철학의 여는 첫번째 증명할 수 없는 진리다. 그렇다면 우리의 육체, 육체의 구조와 한계에 대한 인식은 필수적이다. 이것을 알아야만 정신의 삶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철학한다는 것은 죽는 것이며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는 육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에게 좌우되는 것(무한한 의지)과 우리에게 좌우되지  않는 것(감각, 정념, 육체와 직접 관련된 모든 것 그리고 정신에서는 우리의 유한한 이해력) 사이의 경계를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필연적인 것만을 이해할 수 있으며 필연적인 것은 우리보다 앞서 존재한다. 인간은 진리를 창조하지 않는다. 단지 진리를 알아볼 뿐. 이렇게 진실은 명석하고 판명한 인식과 더불어 절대적인 필연성 속에서 주어진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자유는 죽는다. 그래서 진실은 증명이 가능하지만 유일하게 증명되지 않는 것, 그것이 자유다. 관념이 아니라 행위로서의 자유. 그래서 자유는 인간의 형이상학적 무능이고,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의 근원이 된다. 그러므로 선택은 지속적인 창조가 되고,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할 때 우리는 우연에서 벗어난다. 이해력은 오로지 이러한 자유를 통해서만 심화되고, 자유는 계속 달아난다.

 

‘정념’은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육체라는 한계를 가진 인간에게 주어진 첫번째 관문이다.  정념은 “우리를 자극해서 현실을 실제보다 훨씬 더 대단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그 결과 그것이 우리에게 선을 의미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정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그 정념이 진정될 때까지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 조심하는 것, 이것이 생의 혼돈에 빠진 인간들에게 주어진 난제 중에 난제다. 하지만 정념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정념이 현실을 강조하고 과장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은 우리를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두려움과 욕망을 통해 유익한 쪽으로 현혹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정념을 소멸시키기 위해 애쓰기보다 그것들을 올바로 조합해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이감은 이러한 정념의 시초다. 경이감의 특징은 의식이 전혀 없거나 거의 없는 탐욕스러운 응시의 형태로 나타난다. 한눈에 반하기 같은 것. 하지만 이 경이감이 자발적인 주체에 의해 적극적으로 지속되지 않을 경우 경이감은 그저 편협하고 단순한 호기심에 그치고 만다. 정념에 수동적으로 따르기보다 사유와 행위로 바꾸고, 마침내 최대한 자유롭게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가장 큰 기쁨이 찾아온다. 고매함과 자기만족을 위한 궤도, 정념은 얼마든지 그것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나 정념이 없다면 심지어 오랫동안 간직해온 정념이 없다면 결코 지혜로워질 수 없다.”

 

상상과 픽션, 놀이 혹은 게임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도 그런 지혜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이 책에서는 영화를 하나의 예로 제공한다. 배우의 중개를 통해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정념을 약화된 방식으로 경험하면서 그것을 배울 수 있다. 다만,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슬픈 정념조차 지적인 기쁨을 끌어내고 그 슬픔은 즐거운 슬픔이 된다. 휴식이 효율적인 노동의 조건이듯, 상상과 픽션, 놀이는 훨씬 생각을 잘하게 해준다. 데카르트는 말한다. 진지함은 치명적이고 과학은 위험하다고.

 

자, 이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바로 자유, 자유는 증명할 수 없는 것이며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 오로지 사용할 때만 존재하는 것, 그래서 선택은 자유를 존재하게 하는 행위다. 자기 자신에게 자유를 주는 것, 그것이 바로 데카르트가 말한 고매함. 고매한 사람은 타인을 신뢰하며 자신에 대해 관대하다. 정념이 제 아무리 우리를 속이려 든다 해도 이 자유를 통해 제대로 조종하기만 하면 정념에 대해 절대적인 힘을 갖지 못할 정도로 나약한 정신은 없다는 게, 데카르트의 믿음이다. 증명할 수 없는 자유, 그것은 과학에서 일종의 구멍이자 하나의 결함과 같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통로이자 빛이며, 철학이 찬란하게 빛나는 구멍이다.

 

고매함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먼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 그것이 가장 고결하다. “가능한 한 항상 자유롭고 자신의 본성과 본능에게서, 기존의 자신에게서 벗어나겠다는 다짐이야말로 우리를 인간적으로 만들어주는 공통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고매한 인생이라고. 그래서 우리가 자유로운 건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자유는 존재 이전이 요구, 그것은 존재에 형태를 부여하려는 요구. 자기 자신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것, 그것은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것. 더불어 자유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것은 제약이 아니라 고귀함의 표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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