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회의하고 의심하기

양화 2010. 7. 10. 09:56

나는 거대하거나 지배적이거나 그런 것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다. 그래서 대기업이 싫고, 베스트셀러가 마땅찮다. 좋아하던 노래가 너무 히트를 하면, 갑자기 애정이 식기도 한다. 이 본능적인 거부감이 어디서 기원한 것인지 나도 알 도리가 없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영향 받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주류가 만약 제대로 된 거라면 세상이 아직도 이 모양일 리가 없잖아.. 그러니 그 지배적인 것들부터 의심해야 해.. 이러는 거 아닐까. 우리나라나 전세계적으로 산다 하는 나라에서 퍼지고 있는 윤리적 소비 운동이나 노블리스 오블리주, 혹은 기부 문화 같은 것에도 거부감이 들기는 마찬가지. 가난한 사람들을 더 잘 돕기 위해 일단 기업을 살려야 하고, 그들이 돈을 벌게 해줘야 하고... 그런 논리가 마음에 안 든다. 애초에 잘 나누면 되지, 왜 다 빼앗아서 한쪽에 몰아준 다음에 그걸 선심 쓰듯 나눠주고 그걸 받는 사람들이 감사해야 해? 이런 어깃장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베스트셀러를 읽지 않는 건, 무의식적인 기피가 아니라 밑바닥부터 굉장히 의식적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 있는 동안 한국 책을 구하기 힘드니까 벨뷰 도서관 세계언어 카테고리에 있는 한국어책을 빌려보게 되는데, 이 리스트가 거의 베스트셀러 위주다. 그래서 화제가 된 시기가 훨씬 지난 베스트셀러를 주로 읽고 있다. 한창 인기몰이를 했고, 최신간인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제목이 맞나?)도 역시 초베스트셀러가 된 말콤 글래드웰의 책 '블링크'와 '아웃라이어'도 이제서야 보았다. 가장 최근에 손에 들었던 책은 2000년대 초반 화제가 되었던 제레미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이다.

 

말콤 글래드웰의 책을 읽는 동안 책 내용이 흥미진진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지만 다 읽고 나면 웬지 늘 찜찜함이 남았다. 열심히 성실히 살아간다면 세속적인 의미의 성공에 이를 수 있다는 게 결국 결론이잖아, 싶은 생각이 들어서다. 성공을 절대선으로 전제하는 것도 마땅찮고, 그 성공이 개인적 만족 여부와는 상관없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레미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은 여러 모로 들을 거리가 많은 책이었다. 일각에서는 제레미 리프킨을 기획기사를 잘 쓰는 기자, 정도로 폄하하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그가 '육식의 종말'에서 들려준 말은 들어볼 가치가 있는 말이었다. 나야 어렸을 때 가난하기도 한 데가 시골 출신 부모님 덕에 야채를 많이 먹어선지, 아님 그냥 체질이 그런 건지 육식이 잘 안 맞아서 육식을 의식적으로 멀리할 필요도 없이 별로 먹질 않지만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 그동안 우리 아이들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아무 생각없이 먹여온 온갖 고기들이 생각나서 마음이 좋질 않았다. 제레미 리프킨은 인간이 알타미라 동굴에 소 그림이 남긴 고대부터 소와 인간이 가져왔던 관계를 고찰하는데 앞부분을 할애했다. 그 관계는 신성하고 친밀한 관계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의 선조는 자신들이 (소에게-여기선 소지만 이 소는 자연 혹은 생태계 전체로 바꾸어도 무방할 것이다) 은혜를 입고 있으며 통제할 수 없다고 여긴 '번식의 힘'을 숭배했다. 소와의 관계는 신성하고 친밀했는데, 그것은 두려움과 의존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신의 비위를 맞추고 다산과 풍요의 축복을 받기 위해 소에게 경의를 표시했다. 그들의 의식과 관습은 우주의 힘을 자신들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이끌면서 동시에 번성을 누릴 목적으로 고안되었다. 그들은 신성한 번식의 힘을 자신의 존재 속에 합일시키고, 영원한 재생의 주기에 동참하기 위해 쇠고기를 먹었다.(347)"

 

하지만 이런 관계가 어긋난 것은 계몽주의 시대 이래 자연관이 바뀌면서부터다.(근데, 이것 역시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모르겠다)  그 시기에 "...우리는 신의 자리를 우리 자신으로 대치하고 소를 조작 가능한 자원으로 탈바꿈시켰다. 우리는 소와 자연의 번식력에 대한 지배를 획득했으며, 이 두 가지 모두를 우리의 이성적인 의지에 종속시켰다. 그 결과 우리는 자연의 의존에서 벗어났지만 그 과정에서 다른 창조물과의 신성하고 친밀한 교류를 상실했다. 우리는 자연과 동료 인간들을 지배하기 위해 쇠고기를 먹었다."(347) 그런데, 이 관계의 이면에 무엇이 작동했을까. 그것은 바로 "생산속도 향상, 비용 절감, 이윤 증대"(171), "... 기술적으로 사고하고 운영되며 실용주의와 시장 효율성의 편협한 목적에 맞게 재구성된 상업적 자원에 모든 자연과 삶을 국한시키는 '차가운 악'(344)"이다. 그 첫 번째 예비 과정은 직접적인 살생의 과정에서 인간의 존재, 아니 인간적 감정을 소거하는 것이었다. 출판사 일을 할 때, 두번째 책으로 '시골에서의 1년'이라는 책을 만들었는데, 그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시골에서 양봉을 하며 살아가는 저자가 닭을 키우는데, 닭이 어느 만큼 컸을 때 그 닭을 잡아야 하지 않을까, 고민한다. 하지만 끝내 닭을 잡지는 못한다. 그이는 슈퍼마켓에 목과 털까지 말끔히 없애 하나의 상품으로 놓여진, 깔끔하게 포장된 닭을 사면서 자신이 생명체를 직접 죽여야 하는 그 과정에서 빠질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그걸 읽으면서 그럴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그건 지그프리드 기디온이 "기계가 명령을 받는다"라는 책에서 이미 이렇게 이야기한 바 있단다.

 

"대량으로 소를 도축하는 과정에서 진정 놀라운 것은 살생에서 완전히 중립적인... 그것은 생산과정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고 순식간에 일어나기 때문에 좀처럼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어떤 사람은 전혀 보지도 못하고, 어떤 사람은 전혀 느끼지도 못하며, 또 어떤 사람은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144, 재인용)" 노동자들이 단순한 기능직으로 분자화된 채 고도의 분업화 과정에 편입됨으로써 생산효율성을 높이고 노동자 스스로는 자신들의 존재를 거대한 기계 장치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게 되는 자동차 생산 라인의 모습은 쇠고기의 해체 공정을 그대로 본뜬 것이란다. 하지만 어디 그게 자동차 생산 라인에만 적용될까. 그건 자본주의 사회의 어떤 조직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분업화와 연속생산, 대량생산, 특히 효율성과 같은 근대산업 생산의 중추적인 개념"(145)으로서 말이다. 효율성과 이윤의 극대화라는 자본주의의 절대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인간적인 감정 - 연민, 분노, 공포, 연대 - 은 거추장스러운 것일 밖에. 그리고 그런 비인간적인 생산 체계로 바뀌는 과정은 자본주의가 탄생한 이래 어느 시기에, 어느 지역에, 어느 분야에 적용해도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산업혁명 이후 이른바 자본주의가 맹아가 꽃 피던 영국이나 제국주의가 횡행하던 식민지 시절이나 지금의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나 효율성, 이윤의 극대화라는 이름하에 가장 약한 사람이나 지역이 가장 먼저, 가장 잔인하게 착취 당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쇠고기일까. 내막을 알고 나면 자본주의의 작동원리가 더 잘 드러난다. 잘 아다시피 소를 주요 식량으로 소비하는 것은 다른 것을 섭취하는 것보다 에너지 전환이 비효율적이다. 화학자 G. 타일러 밀러라는 사람은 자연의 진화 모형에서 생태계가 유지되기 위해 에너지 법칙이 어떻게 운용되는지 간단한 먹이사슬을 가지고 증명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먹이를 포식하는 과정에서 약 80-90% 의 에너지가 주변으로 상실"되고 고작 10-20%의 에너지만이 포식자의 세포에 축적되어 다음 단계의 먹이사슬로 전환될 에너지로 남는다. 그런데 이 논리에 따르면 소를 비롯한 가축의 에너지 전환율은 정말 낮다고 한다. 식량 경제학자 프랜시스 무어 라페는 1979년 한 해에만 소 등 가축을 키우는데 들어간 곡물이 미국에서만 모두 1억 4500만 톤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가축들을 인간이 소비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에너지로 전환되었느냐 하면 고작 2100만 톤이었다는 것이다. 사람이 소비한다면 엄청난 에너지가 되었을(계산에 따르면 모든 지구인들이 1년 동안 날마다 곡물 1컵씩을 먹을 수 있는 양이란다) 나머지 1억 2400만 톤의 곡물과 콩은 가축을 먹이느라 뿅하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194-195) 이런 비효율성에도 불구하고 왜 목축은 계속되는가. 그게 바로 자본의 이익 때문이다.

 

인디언의 삶의 터전이었던 서부 평원에 버펄로가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리고(그와 함께 인디언의 삶도 보존구역 속 박제된 삶이 되어버렸다) 거대한 목축장이 된 것도, 지금 아마존의 열대우림을 방목지와 농경지로 전환되고 있는 것도 모두 자본의 이익 때문이다. "근대적 육우 사업은 고도의 자본집약적 산업인 동시에 노동 절감 산업이다. 농업에서는 때때로 1평방 마일에 농부를 100명까지 고용할 수 있지만, 열대우림 지역의 축산 목장에서는 평균적으로 소 2000마리에 인부 1명을 고용하는데, 이는 기껏해야 12평방 마일에 인부 1명이 고용되는 수치이다."(181) 그런데, 이 과정에서 우리가 잃는 것은? "생태계 안정성과 유전자 다양성 같은 무형자산이다. "육식의 종말"에서는 그걸 실감나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중앙 아메리카나 남아메리카에서 사육된 육우로 만든 4분의 1 파운드짜리 햄버거 한 개에는 대략 75Kg에 이르는 생명체 파괴가 뒤따른다. '여기에는 20-30종의 식물, 100여 종의 곤충, 수십 종의 조류, 포유류, 양서류가 포함된다'("적도 열대우림의 사람들", 줄리 덴슬로와 크리스틴 패도흐)"(238, 재인용) 그 뿐인가. "거대한 축산단지는 지구 온난화 현상을 일으키는 네 가지 가스 중 메탄, 이산화탄소, 아산화질소를 배출하는 주요한 요인이다"(268) 또, 수학자 로빈 허는 미국에서 침식되는 토양 중 60-70억 톤이 소 사육과 관련되어 있다고 했는데, 전 지구적으로 일어나는 토양 침식과 사막화의 확산도 상당 부분 목축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토양침식 사막화는 미래 세대에 떠넘겨지는 환경적 부채의 형태로 축적되고 있으나(243) 자본은 이런 현실에 대해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자본은 종교와 과학, 철학 등 수많은 것의 지원을 받았다. 종교적으로는 유대교를 비롯한 기독교에서 동물 도살의 희생적 측면을 없앰으로써 속죄나 죄책감을 없앴다. 신은 자신의 형상을 본떠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에게 다른 생명체를 관리할 권한을 주었으므로 인간이 고기를 먹는 일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자연은 인간의 실용적 필요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했고, 다윈주의자들은 진화의 유일한 목적이 자연 속의 치열한 경쟁에서 적자생존을 도모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진화된 존재로서 인간은 다른 생명체인 고기를 되도록 많이 섭취하여 신진대사를 활성화함으로써 적절한 진화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334) 인간은 이런 과정을 통해 생명체 살해에 수반되는 공포, 수치, 혐오, 후회의 감정을 극복할 수 있었다. 또한 이 과정을 통해 자연은 자원과 상품으로 변형되었다. 그리고 공장형 비육장과 도축공장 조합 공정을 통해, 패스트푸드 체인 등을 통해 인간인 노동자들과 소비자는 이윤 중심의 실용주의적 구조 속에서 소와 마찬가지로 그저 생산과 소비의 구성단위가 되어 버렸다.(326) 제레미 리프킨은 이러한 현대적 축산 단지를 "차가운 악"의 상징으로 규정한다. 무장강도, 강간, 고의적인 동물학대 같은 "뜨거운 악"에 비해 차가운 악은 "먼 곳에서부터 영향을 미치고 기술과 제도의 허울 속 깊은 곳에 모습을 숨기고 있으며, 그로 인한 제도적 결과는 때로 쉽게 사라지지 않거나 전혀 우연한 관계라고 의심되지 않는 가해자나 피해자들로부터 야기된다."(342) 개인적 특성이 없는 이런 형태의 악은 인간에게 뜨거운 악 같은 격렬한 분노를 일으키지 못하고 그 결과 그 악은 쉽게 제거되지 않고 정당화되거나 합리화된 채로 오래 지속된다.

 

책을 다 읽고 나서 거대한 것, 지배적인 것에 대한 내 본능적인 거부감이 어쩌면 그 보이지 않는 악의 그림자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다. 거대해지려고 하는 것은, 지배적인 것이 되려고 하는 것은 언제나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 어떤 것이 가치있는 것인가를 지향하기보다 효율성과 이익을 지향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것들을 지향하지 않고는 이제 더 이상 거대해지지도, 지배적인 것도 되지 못하니까. "붕가붕가레코드의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을 만들 때, 나름 대표이사인 곰사장이 '장기하'가 너무 떠버리는 바람에 갈등하던 것이 생각난다. 책을 만들자고 접근했을 때는 그저 EBS '스페이스 공감'의 루키로 인터넷에서 좀 반응이 오고 인디밴드들의 꿈의 무대였던 '쌈싸페'에 설 수 있게 된 게 그저 신기하기만 할 때였고, 원고를 본격적으로 진행해보자 했을 때는 장기하가 훅 떴을 때였고, 원고를 마무리할 때는 그 기세가 한풀 꺾인 때였다. 책에는 그 과정이 고스란히 담길 수밖에 없었는데, 그 말이 기억에 남는다. 장기하와 얼굴들이 뜨고 상근자들이 하나둘 생기면서 그들은 안정적인 수입이라는 덫에 걸리게 된다. 가장 쉬운 길은 장기하와 얼굴들을 최대한 우려 먹는 것, 한 마디로 주류, 지배적인 것이 되는 거였다. CF도 찍게 하고, 버라이어티에도 내보내고 다른 소속팀들은 제2, 제3의 장기하로 포장하고, 다음 음반을 더 팔릴 만한 물건으로 만들어볼까 하는 것. 하지만 그들은 그 길을 선택하지 않기로 한다.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을 힘들게 하는 것은 다음에 두 걸음 나가야 한다는 부담이 있기 때문, 그렇다면 한 걸음만 나가도 충분하게 반 걸음만 후퇴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면 된다. 일하면서 남는 시간에 만든 노래를 주말에 녹음해서 한 달 남짓한 시간에 음반 하나를 만드는 식으로 생업과 병행할 수 있다면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음악을 할 수 있게 된다. 일보 전진을 위한 반보 후퇴... ('장기하와 얼굴들'이 보여준 길이) 아무리 반짝반짝 윤이 나더라도 멍하니 그 길을 따라가면 안된다. 우리가 가는 길이 그렇게 아름다울 리 없다는 게 소심한 체질에 어울리는 발상이다. 그렇다고 마냥 비관하겠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면 아마 걷기를 포기하고 주저앉게 될 테고, 그건 바라는 바가 아니다."(붕가붕가 레코드의 지속가능한 딴따라질, 127) 붕가붕가 레코드 책은 생각만큼 많이 팔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난 그게 더 좋았다. 내가 바라는 것도 이런 삶인 것 같다. 앞으로 딱히 기대할 만한 것이 없는 삶, 커다란 꿈은 없지만 스스로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길을 느리게 걸어가는 것. 그 길이 승리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뭐 상관없는 그런 삶. 많은 사람이 우루루 한 길로 가지 않고 여러 패로 나뉘어 이 길 저 길로 가보는 것. 책을 읽고 많은 것을 생각했지만 당장 육식을 끊거나 할 수 있을 거 같진 않다.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 아침은 맥도널드 아침 메뉴를 먹을 것이고, 가끔 삼겹살을 구워 무쌈에 곁들여 먹을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육식문화에 드리워진 제도적 문제에 대해 얘기 했으면서도 결론은 개인적이다.

 

"수많은 미국인, 유럽인, 일본인 및 다른 나라 국민들이 "개인적으로" 쇠고기 없는 세상을 선택한다면, 20세기에 세워진 인위적인 단백질 사다리는 와르르 붕괴될 것이다. 육식을 삼가는 사회적 결정은 금세기 인간 생존의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다가오는 새로운 세상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식품 사슬의 아래쪽에 위치한 음식을 자발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수백만의 다른 사람들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칼로리를 섭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전지구적 식량 재분배는 인류를 새로운 형제애의 결속으로 뭉치게 할 것이다. 새로운 인류에 대한 자각은 전세계 단백질 사다리에서 부자와 빈자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지점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350) 처음엔 이 대목을 읽고 갑자기 허무했다. 여태 제도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문제라고 떠들어대더니만 개인적인 선택이라고? 그렇게까지 얘길 했으면 당장, 이 세상의 악과 싸우기 위해 다들 모여 싸우자, 정도가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해서.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게 아름다웠다. 오늘부터 이 나라에서 육식을 금합니다. 하는 것보다 미국의 어느 집에서, 또 한국의 어느 집에서 오늘부터 고기 섭취를 줄이기로 했어요, 하고 결정하고, 그것을 점차 늘려가는 모습, 그것이 사회를 조금씩 변화시켜가는 모습.. 지배적인 것을 거스르는 작은 행동이 하나하나 모여 세상의 모습을 조금씩 바꿔가는 모습을 그려보니 정말 멋질 것 같았다. 각성한 개인의 연대를 통해 세상을 바꾸는 것, 그러려면 지배적인 것, 거대한 것을 먼저 의심하고 회의해야 한다. 개인이 바꿀 수 있는 게 과연 얼마나 될까, 그런 의구심을 버리지 못하는 와중에도 내가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가 되지 못하는 건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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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어보니, 이건 뭐 황당무계한 글이다. 그래도 의식의 흐름에 따라 쓴 밑줄긋기였다고 우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