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기모노 착용 기술을 익힌 전문 여성입니다. 나이는 서른에 가깝고 미혼입니다. 친구들은 모두 결혼을 했고요. 요즘은 이런 말을 하지 않지만, 굳이 말하자면 스기코는 노처녀인 셈입니다. 1975년 무렵이라면 이런 여성은 같은 처지에 있는 요즘 여성보다 훨씬 위축되고 설자리가 좁은 존재였겠지요.
그러나 이 작품에는 스기코의 쓸쓸한 처지를 느끼게 하는 묘사가 전혀 없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직접적으로 쓰지 않는 것으로 인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타인의 과거 연애를 슬쩍 들여다본 그녀는 거기에서 다양한 느낌을 받았을 겁니다. 그러므로 작가가 줄거리를 더 복잡하게 만들기 위하여, 스기코가 왜 움직이지 않았는지, 왜 심술궂고 탐욕적인 면을 드러내지 않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을 겁니다. 스키코도 예전에 바람직하지 않은 연애를 한 적이 있다든지, 결실을 맺지 못한 연애 경험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한 마음 여린 여성이라서 타인의 행복을 차마 깨뜨리지 못했다든지.
하지만 그런 설명은 전혀 없습니다.
스기코라는 사람은 아마도 그런 장면에서 뭔가를 회상하거나 작가가 묘사할 만한 연애 경험이 전혀 없는 여성일 겁니다. 스기코의 과거에는 그런 파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떠올릴 사연도 없고 자기 경험에 비추어 받아들일 수도 없지요. 스기코는 극적인 인생, 소설적 인생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그런 여성은 창작물에서는 대체로 그 텅 빈 부분을 혼탁한 악의로 채우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자기가 누리지 못한 만남이나 사랑을 얻은 여성을 시샘하거나 그 여성이 가진 것을 빼앗거나 망가뜨리는 여성으로 빚어집니다.
하지만 스기코는 다릅니다.
저는 여기서 고독한 인간에 대한 세이초 씨의 따뜻한 시선과 경의를 느낍니다.
쓸쓸하다고 해서 악의만 키우는 것은 아닙니다. 타인의 인생을 차분하고 담담하게 건너다보면서 자신의 일상을 묵묵히 살아가는 고독한 사람의 선의와 긍지라는 것도 분명히 존재하는 거죠.
스기코는 세이초 씨의 그런 따뜻한 신념의 화신이라고 생각합니다. p. 16-17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중) 중에서
떠나오기 전 읽은 책들 가운데 기억해두고 싶은 책이 몇 권 있었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걸작 단편 컬렉션은 꼭 언급해두고 싶은 책이었는데, 상편을 읽고 시간이 너무 지나버려 에이, 말자 하고 있다가 서점에서 상편에 이어 중편이 나온 것을 보고 냉큼 사서 여기까지 들고 온 것이다. 꽤 두꺼운 책이지만 한번 잡으면 끝장을 보게 되는 데다, 그렇게 쉽게 금방 읽어치우기가 아까워서 도무지 재미없는 미국식 유머를 유머랍시고 구사하는 <쉿, 조용히!>와 존경하고 사랑하는 요네하라 마리 여사의 최신작 <미식견문록>을 읽고서야 마지못해 세이초 단편집 둘째 권을 집어든 것이 바로 어제. 미국 사서의 좌충우돌 도서관살이를 그린 <쉿, 조용히!>는 지겨워,를 연발하면서 겨우 마쳤고, 마리 여사의 최신작은 유머도, 쫄깃쫄깃 맛있는 문체도 여전했지만 간간히 눈에 띄는 그런 상큼함으로 위로 삼기에는 책 전체가 너무 가벼웠다. 아, 욕구불만.. 세이초는 그래서 꺼내든 비장의 무기였던 것이다.
미미여사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미야베 미유키가 책임 편집을 맡아 각 장마다 소개글을 붙여 더 유명한 이 컬렉션은 세이초의 작품도 작품이지만 미미여사가 쓴 작품 해제가 일품이다. 작품 해설만 보아도 얼른 그 글이 읽고 싶어 군침이 넘어가게 하는 글이라고 해야 하나, 책을 읽고 싶게 소개하고 그래서 많은 이들이 책을 함께 읽고 함께 떠드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꿈인 나로서는 시기와 질투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게 하는 미미 여사의 해제를 본문보다 앞세울 수밖에 없다. 위의 글은 '결혼식장의 미소'라는 작품 해제의 일부인데, 저기 쓴 말만큼 세이초의 작품 세계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글도 없지 싶어 옮겼다. (허, 흥미에다 정확하기까지! 미미여사, 짱 드셈!!)
'거장의 출발점부터 종착점까지' 어쩌구, 저쩌구 쓴 표지 글에 현혹될 짬밥이 아니었기에 그게 책을 선택하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개나 소나 거장이고 걸작이래, 하는 어깃장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세이초 컬렉션 상편의 첫 작품 '어느 <고쿠라 일기> 전'을 읽고는 곧장 '잘못했습니다' 하고 머리를 깊이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장애를 갖고 태어난 한 사내의 일대기를 담은 '어느 <고쿠라 일기> 전'은 정말 좋았다. 인생의 본질은 '쓸쓸함'이라는 사실에 동의하는 사람은 장담컨대, 이 글을 읽고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화려하지도 않고 감각적이지도 않으면서 사람의 그 설명할 수 없는 내면과 분위기를 탁 만지게 하는 그 담백한 문체. 다 읽고 나면, 난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하고 인정하게 만드는 초탈함.(세이초 할배, 역시 짱 드셈!)
다 읽고 나면 마음을 덜컥 내려앉게 만드는 그것의 정체가 뭘까 생각해보니 그것은 미미여사가 지적한 바로 그것, 특별한 사건이나 역동적인 굴곡 없이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선의와 긍지에 대한 존경이 아닐까 싶다. 거창한 사건도, 탁월한 업적도 없지만 조용조용 자신의 삶을 성실하고 뿌듯하게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 대한 존경,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보이는 삶에 깃든 미세한 결을 짚어주는 섬세함, 의미없어 보이는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 조촐한 삶의 위대함과 품위. 아직 입문하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세이초 월드로 한번 와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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