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인간에게 본질은 없다

양화 2011. 7. 20. 15:28

'우리'라는 것은 특정한 사회적 맥락에서 특정한 사람에게 배워서 만들어진다. 그나마도 사람들이 생각하거나 희망하는 만큼 공통적인 '우리'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서로 다른 존재들이다. 인간에게 본질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허구일 뿐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 우리가 서로 의논해서 만들어가는 것이다. 정해진 '우리'에 대한 집착은 생산적인 의논을 방해할 뿐이다(275)... 적응이라는 개념에는 '우리'가 포함되어 있다. 한 사람의 문제로 봤을 때, 정신분석은 그 사람을 '우리' 중 한 명으로 만들려고 한다. 하지만 그 '우리'는 인간에게 본질 같은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체적인 내용을 갖는 '우리'가 아니다. 정신분석의 '우리'는 매우 광범위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277)

 

당신은 마음에게 속고 있다, 최병건 지음 

 

 

공짜로 얻은 책에 대해서는 호평이든 악평이든 되도록 입을 다물자는 주의다. 결벽증 같은 것이기도 한데, 아무래도 책을 저자에게서든 출판사에게서든 공짜로 얻으면 내 감상의 출발선이 호의쪽에 그어지기 때문에 공정한 평가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싶어서다. 그런데, 또 가만히 생각해보면 책을 공짜로 얻기까지 했는데, 좋은 얘기든 나쁜 얘기든 해주는 게 책을 준 사람에게 예의가 아닐까 싶다. 모두에게 공개되지도 않는 블로그에 두서도 없는 책 이야기를 끄적이면서 참, 생각도 많다. 내가 무슨 대단한 파워블로거나 된다고. =_=;; 푸른숲에 가면 신간을 한 두 권씩 챙겨주는데, 괜히 미안하다. 이젠 거기서 일도 안 하는데, 마땅히 사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정성껏 열과 성을 다해 만드는 책인지 빤히 아는데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 취향상 푸른숲의 책들이 누군가 혹 준다면 읽겠지만 굳이 돈을 내고 사보고 싶다는 생각이 잘 안 든다는 거다. 이번에 얻어온 '심야치유식당'(하지현 지음)과 '당신은 마음에게 속고 있다'(최병건 지음) 같은 류의 책들이라면 더욱. 그러잖아도 모든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는 심리학 책들이 많아지는 것이 못마땅한데, 나이에 맞춰, 성별에 맞춰, 온갖 상황에 맞춘 심리학책들이 넘친다. 웬만한 책들을 섭렵하고 나면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인 것만 같은데도 계속 나온다. '당신은 마음에게 속고 있다' 역시 그런 종류의 책일 거라 생각했다. 게다가 소재가 영화라니! 이 영화의 표지와 제목과 내용이 애매하고 뭔가 어긋난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 진부한 조합을 어떻게든 피해보려는 편집자의 고뇌의 결과이니 크게 탓하지 말 것.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 읽다가 거의 끝에 저런 구절들을 만났는데, 문득 마음이 편안해졌다. 분명 '우리'는 존재하지만 그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은 데다 개개인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다르다. 이것만 명심하면 세상의 분쟁, 아니, 우리 주변의 분쟁과 갈등은 많이 줄어들지 않을까. 또 하나, 얻은 것은 멜라니 클라인 이론을 접하게 된 것이다. 혹시 클라인 책이 있을까 하고 뒤져보니, 그의 이론을 해설하고 생애를 정리한 책이 전부다.

 

컵셉이며 표지며 나무랄 데 없는 '심야치유식당'은 너무 고급스럽다. 과연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에 감정이입할 수 있는 이들이 몇 명이나 될까 생각이 들 만큼. 회자된 데 비해 책이 많이 안 팔렸다고 해서 의아했는데, 책을 보니 의문이 풀리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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