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 지음/강/396면/2007
서평지 기자 시절, 기사를 쓸 때마다 편집장님과 주간님께 혹독하게 혼이 나곤 했습니다. 한번 이렇게 혼이 나면 한 일주일 정도는 입맛이 다 떨어지고 나는 살 가치가 없어, 이런 극자학 모드로 살아가게 되지요. 잘못 쓴 조사 하나, 주어와 술어의 호응이 맞지 않는 문장, 이런 기본적이고 시시콜콜한 것부터 기사 전체의 구성까지 지적사항은 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세게 다그친 부분은 바로 감상을 덜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뼛속까지 저널리스트였던 주간님과 편집장님은 자코메티의 조각처럼 본질만을 명료하게 이야기하는 단정하고 명철한 문장을 요구하셨지요.
물론 제가 도달할 수 없는 경지였습니다. 하지만 자꾸 발라내고 발라내는 연습을 하는 동안 엉뚱하게도 감정을 느끼는 감각점들이 도려내졌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어쩌면 제게 그런 감각점들 따위는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주간님이나 편집장님이 채찍질한 경지는 너저분한 감상이 아니라 오히려 정확한 감각이었으니까요. 제가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구질한 감상 찌꺼기들이었을 따름이죠. 씨네 21의 여러 기자들 가운데 각별히 사랑하는 김혜리 기자가 그동안 썼던 기사들을 가려 모아 책을 냈습니다. 책을 사놓고 한참동안 읽지 않았습니다. 읽기 시작하면 너무 금세 읽어버릴까 봐 아까웠던 거지요.
김혜리 기자의 글이 좋은 것은 바로 정확한 감각입니다. 게다가 그이의 글을 더 각별하게 만드는 것은 그 감각이 저널리스트로서의 정확성과 간명함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의 글은 날카로운 감각점을 통과해 차가운 머리로 가서 섬세한 손끝으로 가다듬어져 읽는 사람에게 전달됩니다. 그에게 영화란 복잡하고 어렵기 짝이 없는 인간과 세상을 보는 창이며, 이해하게 하는 책이면서 그것의 감상을 탄환 삼아 무언가를 쏘아 맞혀야 할 총입니다. 감성의 과잉을 불편해할 사람도 있겠으나 제 가슴은 그에게 정확하게 꿰뚫렸습니다.
주제와 줄거리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영화를 이야기할 때, 그의 글은 더 빛나고 예리합니다. '디 아워스'를 이야기하는 그의 글을 읽다 보면, 그 글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두드리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치사량의 삶을 누리고 싶다"는 문장을 읽으면, 돌멩이를 주머니에 채워넣고 물속으로 들어간 버지니아 울프의 젖은 얼굴이, '삶에서 도망침으로써 평안에 도달할 수 없다'던 그의 말과 함께 떠오르지요. 보통의 서사를 따르지 않는, 그래서 뭐가 뭔지 알듯 모를 듯한 영화를 볼 때, 그이는 더 섬세하게 반응합니다. 우리 삶이 영화처럼 발단, 전개, 절정, 결말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아챘기 때문일까요?
영화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의 리뷰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생에 대한 주체의 완전한 지배와 결단력을 증명하는 그녀의 죽음에 서린 아름다움은, 자살의 매혹과 닮은 데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소피 숄의 이야기에 드리운 가장 눅진한 슬픔이기도 하다. 그녀의 삶은, 더럽혀질 시간조차 갖지 못했다." 그이는 자신의 삶과 그들의 삶의 양탄자에 비슷하게 그려진 무늬와 섞여들어간 색에 반응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쓸 때, 그의 글은 한층 사려 깊어집니다. 휴 그랜트를 세속적 이기주의자이자 따뜻한 회의주의자로 그려낸 기사는 딱 제 마음이었습니다.
책을 다 읽고 캐리커처로 표지에 그려진 그이의 모습을 들여다 봅니다. 나붓이 수그린 머리의 각도와 싹 걷어올린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 몇 올, 살짝 찡그린 미간을 더듬다 '영화야 미안해'라는 제목을 보면 얼핏 그이의 낮고 여린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글을 쓰면 쓸수록 잘 할 수 없어서 몇 번이나 좌절하는 동안 그 절망감이 내면화되어 어느새 중독이 되어버렸노라고. 그게 긍정적 에너지가 되어버렸다고(괜찮아, 어차피 잘 안 될 거야) 하는 그의 말에 당신이 그러면 나는 어쩌라고, 싶다가 뭐 난 기자도 아니고 저자도 아닌데, 했다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습니다. 괜찮아, 사는 건 어차피 어려운 일이야 그러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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