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빈 지음/동녘/294면/2003년
철학자라고는 소크라테스 정도나 알고 있던 무식한 제가 대학에 들어가 처음으로 한국철학을
접하게 되었을 때, 너무나 놀랐습니다. 잠결에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원효나 주리론의 대가로 주기론의 이이와 쌍벽을 이룬
성리학자로만 알고 있던 퇴계 이황을 우리나라보다 일본에서 훨씬 많이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퇴계 이황은 거의 성인(聖人)으로
추앙받는다는 것을 알고는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스스로 부끄럽다 보니, 원망할 대상을 찾아야 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철학이 있다는
사실을 왜 안 알려준거야 하고 말이죠. 그런데, 곧 이 책을 찾아들고는 무척 기뻤습니다. 우리나라 대표 철학자 9명의 삶과 사상을 통해 우리
철학의 흐름을 꿰면서 그 내용을 알기 쉽게 풀어놓았기 때문입니다. 통일 신라의 원효, 고려의 지눌, 조선의 서경덕, 이언적, 이황, 이이,
정제두, 박지원,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한국철학의 세계는 넓고도 깊었습니다.
가령 우리에게는 명기 황진이도 그 인품에 감복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는 화담 서경덕은 당대의 학자들과는 새로운 철학 흐름을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자연 속에서 도덕원리를 찾으려던 성리학자들에게
자연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세계라기 보다 인간의 질서가 반영된 세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묻습니다. “묻노니, 부채를 흔들면
바람이 생기는데, 바람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라고요.
“바람은 기라네. 기는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해서 물이 계곡을 꽉 채워
조금의 틈도 없는 것과 같네”라며 세상을 채우고 있는 것은 ‘기(氣)’라고 말합니다. 하곡 정제두도 눈에 띕니다. 정몽주의 11대손이었다던 그는
주자학이 관념으로 흐르는 것에 정말 중요한 것은 마음과 실천이라고 했답니다. 세계의 기원을 자연물로 보았던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과 변주를
거듭하며 근대 합리론과 경험론에까지 이른 서양철학과도 묘하게 겹쳐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