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있다. 더듬더듬 시간을 등뼈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어떤 시간의 매듭이 만져지는 순간.
아, 그때 그런 일이 벌어지지만 않았어도, 그때 이런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 내 삶은 많이 달라졌을 텐데, 싶은 순간이 말이다. 삶이 엉망으로
꼬여갈수록 후회와 아쉬움, 한탄이 커져서 수렁에 빠져들 듯 점점 더 그 순간에 집착하고, 감히 그것을 되돌릴 수 있을 거라고 믿기 시작한다.
그러면, 삶이 새롭게 시작될 거라고, “밥맛도, 단잠 끝에 맞는 아침 햇살 맛도, 꿀맛 같은 잠에서 깨어나 찬란한 아침햇살을 보게 될 거”라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여기 두 남자가 있다. 잘못 꿴 단추를 풀어 다시 채우기만 하면, 자기 인생에 새 국면이 펼쳐질 거라 믿는 두 남자. 삼촌을 감싸려다 화염에 휩싸여버린 엄마 앞에서 울부짖는 것밖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소년과 믿고 따르던 형이자 직장 선배가 처참한 모습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봐야했던 한 남자. 그 둘의 삶은 거기서 딱 멈춰버렸다. 나머지 삶은 그 순간을 되돌이키기만 하면 그 시점부터 다시 아주 밝고 행복하게 시작될 것이다. 그러니 삶은 잠시 유예되었고, 그들에게 그 시간은 사람으로서 사는 시간이 아니다.
속고 속이고, 목숨을 팔아넘기고, 때리고 찌르고, 마약으로 어떤 이들을 파멸의 길로 이끈다하더라도 그들에게 죄책감이 있을 리 없다. 그들은 그저 미친 듯이 내달릴 뿐이다. 한 사람은 돈으로 바로 그 지점으로 돌아가는 여비를 삼으려 하고, 또 한 사람은 자신을 망쳤다고 믿는 누군가를 자신의 양 손 가득 잡으려 한다. 그걸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다. 피가 튀고, 폭발하고, 자동차들이 부딪힐 때도 나는 슬펐다. 수억을 벌어들여도, 그 놈을 잡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기에 말이다.
삶과 세상의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것은 개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운명이다. 운명을 거스르려 하면 할수록 자신만 초라해진다. 마치 마약처럼. 처음 손을 댈 때 그건 선택이고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그만 둘 수 있다고 믿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점 헤어날 수 없게 된다. 멈출 수 없는 그 삶이 어느 순간, 파국으로 급커브를 트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것이다. 나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최후의 보루였던 통장까지 꺼내들고 애원하던 상도, 삶이 없으면 다시 살 기회조차 없다. 그를 떠나보내면서 짓던 도경장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건 허무하달 수도, 망연하달 수도 없는 아주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 묘한 표정 위로 얼핏 부러움이 지나갔다. 다시 살 수 없다면, 안 사는 게 가장 좋은 길일 것이기에 아, 넌 끝났구나. 이 지긋지긋한 고리를 끊었구나, 하는 안도감과 부러움이 자신도 모르게 떠오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경장은 끝까지 간다. 다시 살 수 있을 거라고, 단잠 끝에 밝은 아침햇살을 맞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도 알았을 것이다. 한번 나타났던 것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삶은 단추를 잘못 끼운 옷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부산의 검은 밤바다 위로 불안한 평화가 흐르고 그 위로 불타는 도시의 네온이 반짝인다. ‘드럽게’ 아름답다. 한번 흘러간 물은 거꾸로 흐르지 않고, 똑같아 보이지만 지금 그 빛이 아까의 그 빛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삶이 아름다운 것은, 그래서 더할 나위없이 고통스러운 건 그것이 단 한번 뿐이기 때문이다. 결코 돌이킬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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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깍지가 아니라도 두 주연 배우의 연기는 참 나무랄 데 없다. 순진무구해 보이지만 카리스마가 숨겨지지 않던 김희라,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당당한 연기 보여준 추자현도 멋졌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상도 캐릭터가 구체적이어서 나름 설득력이 있었다면, 도경장 캐릭터는 붕 뜬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 눈앞에선 펄펄 살아움직이는데, 눈을 돌리면 사라져버릴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그가 과거없는 인간이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서 감독이 캐릭터 만드는 데 좀더 공을 들였더라면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두번째 아쉬운 점은 처음에 르포나 다큐멘터리처럼 IMF 운운하는 자료 화면들이었다. 영화에 현실성을 부여하려는 노력 같았는데, 그게 노력이라는 게 너무 눈에 보인다. 없어도 좋았을 상투적인 리얼리티였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그것이 영화 속에서 큰 의미도 없는데. 첫 장면에 총이 나오면 영화나 책이 끝나기 전에 반드시 총성이 울려야 한다는 말이 있다. 아주 미미한 역할을 하려고 영화 앞부분을 그렇게 의미없이 쓰다니, 아쉽다.
셋째는 류승범의 발견. 사실 난 류승범이 나온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배우 류승범은 흘러간 노래를 엉터리 기타 반주에 맞춰 부르다 삑사리를 내거나, 성형외과 견적을 낸다고 얼굴에 죽죽 선을 그어놓은 멍청한 표정의 몇몇 장면으로만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놀랍다. 거의 재발견이라고 할 만하다. 어린 배우인데, 참 기특하기도 하다. 물론 황배우한테 배웠을 거다. ^^ (사실은 타고 났을 것이다)
감옥 갔다 나와서 오락실에서 다리 떨던 장면이나, 감옥에 있는 동안 자기 시장에 침투한 녀석을 혼내주기 직전, 혼내고 난 직후의 망설임과 두려움과 허탈함이 어우러진 그 복잡 미묘한 표정은 정말 아무나 지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또, 자동차 폭발 장면에서 움찔 하던 것, 삼촌 앞에서 묵혀왔던 감정을 폭발하면서 울지 않으려고 봉고차를 걷어차던 장면들은 정말 압권이었다. 자동차 폭발 장면은 설정은 아닌 것 같던데... 진짜 상도였다면 그랬을 거 같다. 알고 했대도, 모르고 했대도 대단한 감성이라고 생각한다.
장철 캐릭터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누가 봐도 죽이고 싶게 미운 악인 캐릭터로 그려지지 않은 게 마음에 들었다. 전에 '와일드카드'에서 퍽치기범이 눈꼽만큼의 동정을 가질 수 없을 만큼 악당으로 그려졌던 게 - 감독이 너무 주인공 형사들에게 감정을 이입한 듯 - , 또 홀리데이의 최민수의 캐릭터도 너무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 반면, 너무 힘이 없어서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건 아쉽게 느껴졌다. 두 주인공에 대한 집중도가 높아서 그랬겠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악랄한 도경장의 상대라면, 좀더 집요하게 그려져야 하지 않았을까.
여러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기존 형사 영화와는 다른 시각을 가진 볼 만한 영화였다. 자리가 너무 앞의 한쪽 구석이라 대사가 잘 전달되지 않았고, 화면 전체가 균형있게 눈에 들어오지 않아 온전한 감상이 어려웠던 것도 아쉽고. 개봉을 하면 돈을 내고 좋은 자리에 앉아 한번 더 보아도 좋을 듯. 계속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호쾌한 액션 영화를 기대한다면, 다소 실망할 수도 있겠다. 이 영화는 내가 보기엔 액션 영화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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