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와 잠시 서성댔다. 너무 밝은 햇빛이 낯설었고, 붉은 벽돌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하얗게 방실방실 벌어져 있는 목련 송이들도 비현실적이기만 했다. 자박 자박, 머릿속에서는 아직도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누가 애타게 부르기라도 한 듯, 잊고 있던 약속을 불현듯 떠올리기라도 한 듯 그녀는 잰 걸음으로 흙길을 지나 철길을 지나 푸른 보리밭으로 걸어갔다. 불안정한 걸음걸이, 바람에 흩날리던 머리카락, ‘ㄴ’으로 긴장한 팔과 허공으로 열린 손. 그 열린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그제서야 옆에 누가 있는 줄 알았다는 듯, 불현듯 놀라 돌아볼 그녀에게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고 싶었다.
고향을 떠난 이의 삶은 언제나 춥다. 덮을 이불 하나 없는 침대, 끝맺지 못한 고향의 옛 이야기, 눈물 대신 하염없이 쏟아지던 수돗물. 하지만 세상과 사람은 호시탐탐 그가 가진 나머지 한 가지를 빼앗으려 든다. 그토록 가혹하다. 고향 음식 김치를 팔고 고향말인 조선말을 아이에게 가르치며 살아가는 연변 여인 최순희는 허가증이 없어 공안에 쫓겨 다니고, 가슴이 살며시 품어본 작은 감정까지도 짓밟힌다. 눈물은 눈에서 흐르지 않고 가슴으로 떨어져 한켜씩 얼어붙는다. 고개 한번 젓는 일 없이, 반문 한번 던지지 않고, 나날이 얼어붙던 가슴이 어느날 쩡하고 깨지는 것은 그러니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이 선풍기 하나만 열심히 돌아가던 빈 방, 흙먼지 날리던 황량한 길, 그 앞에 선 카메라는 몹시 수줍어한다. 피사체가 움직여도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고 화면 가득 잘린 피사체들을 전시한다. 삶이 언제 보기 좋게 보여주더냐 라는 듯. 생활에서 나는 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넣지 않은 청각적 황량함. 사람을 때릴 때 휙 바람을 가르며 퍽 하고 터져주는 소리가 실은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실제로 들으니 가슴 한 쪽이 갑자기 저밋한다. 물렁한 살덩어리를 치는 둔탁한 소리는 귀를 막고 싶을 만큼 소름 끼치고, 사탕을 핥듯 달콤한 여운을 남기던 키스 소리는 돼지가 게걸스럽게 입맛 다시는 소리 같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보다 가슴을 쿵 내려 앉게 한 것은 휙 지나가던 쥐 한 마리를 보고 쥐약 10봉지를 사던 그녀가, 어두운 부엌에서 물컹 죽은 쥐를 밟고는 눈도 못 돌리고 걸음도 못 떼던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죽은 쥐 꼬리를 잡아 문 밖으로 가지고 나가던 장면이었다. 두려움조차도, 삶에 아직 빛이 남아있을 때나 유효한 감정이었던 것이다. 두려움, 슬픔 같은 감각들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표식이었던 것이다. 물이 고여 흘러내리지 못하고 조금 얼고 다시 그 위에 물이 고여 다시 얼고, 그렇게 단단해지던 슬픔이 마침내 쩡하고 깨진다. 푸른 연이 날아간 거리만큼이나 멀찍이 떨어져 자신의 삶을 겨우 붙잡고 있던 그녀. 아니, 그건 비루한 삶에서조차 놓지 못할 그 무엇이었던가.
문을 나와 어디론가 재게 걸어가던 그녀의 뒷모습을 쫓는다. 그녀는 울고 있을까. 발자국 소리와 허공을 가르던 치마 소리에 숨어 보리를 거두고 벼를 심는 농촌에서 가장 바쁜 계절 '망종'을 향해 달려가던 그녀는 울고 있었을까. 깨진 얼음은 더 쉽게 녹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 울음이 그치거든, 그녀가 누군가의 부름에 가 닿았기를 바란다. 그녀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돌아보았을 때, 그 옆에 내가 있길 간절히 바란다. 도망치지 말고. 외면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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