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서평

새의 선물

양화 2006. 4. 13. 03:22

 

은희경 지음/396면/문학동네/1996년

말 장난 같지만, 책을 다 읽고 ‘새의 선물’의 ‘새’에 동그라미를 하나 붙여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생의 선물”. 12살에서 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던 주인공 진희는 삶을 일찍 안 만큼 “삶에 밑지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슬픔조차도 분리된 자아로 하여금 관찰하게 했던 진희의 그 굳은살 너머에 있는 여린 살갗이 만져졌기 때문입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조롱당하지 않기 위해 앙 다문 입으로 삶을 노려보고 있는 아이.

하지만 세상은 속절없이 흐르고, 아이는 그 무정한 세상과 다른 사람의 삶에서 언뜻언뜻 무장해제를 하곤 합니다. 철없고 순수한 이모, 남편이 죽은 뒤 외아들을 떠받들고 사는 장군이 엄마, 병역기피자이며 바람둥이인 광진테라 아저씨와 착하고 인정 많은 광진테라 아줌마, 신분상승을 위해 뭇 남성에게 교태를 부리는 미스 리, 순정파인 깡패 홍기웅 등 주변 인물들을 통해 진희를 둘러싼 삶은 조각조각 채워집니다.

그들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냉소적이어서 오히려 그들의 삶은 남루하기만 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에는 이쁘고 좋기만 한 고운 정과 귀찮지만 허물없는 미운 정이 있”듯, 진희가 다른 이의 삶을 볼 때도 자신이 삶과 부대끼면서 조건 없이 생긴 미운 정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건 고운 정보다 훨씬 너그럽고, 훨씬 질긴 감정이기에 다른 사람의 삶에 존재하는 고통과 행복을 같은 거리에서 보게 만듭니다.

전쟁통에 실성해 자살한 어머니와 어느 날 사라져버린 아버지. 아이에겐 삶이 준 최초의 상처였을 그 기억들이 진희 자신은 삶의 고통에 면역체가 되어줄 거라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전 오히려 생은 누구에게나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고통이 지나가고 나면 그 삶이 누구에게나 선물이었음을 알게 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행복하기만 한 삶이라면, 한 세상을 살아낸다는 게 뭐 그리 자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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