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우 지음/문학과지성사/2002년
‘등대’라는 제목을 달고 2002년에 새로 나온 이 책은 10년 전, 1993년 ‘등대
아래서 휘파람’이라는 제목으로 한번 나왔던 책입니다. 우리에게 등대가 환기시키는 이미지는 여럿이지만 노래 ‘등대지기’처럼 한겨울, 파도도
얼어붙는 작은 섬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길잡이를 해주는 쓸쓸한 모습이 가장 강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 ‘등대’보다는 ‘등대 아래서
휘파람’이 이 책에 훨씬 어울리는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인공 철이는 제일 먼저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누이와 어머니와 차례로
이별합니다. 그리곤 외항선원이 되어 이국의 망망대해를 떠돕니다. 바람난 아버지 뒤로 남은 건 바보 누이에 생계 때문에 노상 눈이 퀭한 채
재봉틀을 돌리는 어미, 연약한 또 다른 누이 뿐입니다. 학교도 싫고 세상 누구도 자기편이라고는 없는 것 같은 시절. 크기도 전에 철이에겐 원망과
미움과 피로와 죄책감이 쌓여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그렇게 슬프지 않습니다. 길을 오래 돌아 비로소 아버지를 만나 화해하고
철이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간은 알고 보면 누구나 한 척의 배가 아닐까요. 끝도 시작도 헤아릴 수 없는 영겁의 시간, 그 어두운 바다 위를
떠도는 낡고 길 잃은 배들 말예요. ... 그렇지만 아버지, 때로 우리는 항로를 잃고 밤바다를 떠도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멀리서 반짝이는 작은
불빛이나 등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 이제 비로소 추억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아무리 참혹한 순간이라도
추억을 가진 인간은 누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저자의 생각이 헝겊주머니에 든 꽃물처럼 배어나옵니다. ‘등대’는 그 자체가 그렇게 계몽적인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등대 앞에서 휘파람’은 훨씬 사적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등대가 되겠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누군가 밝혀놓은 등대 앞에서 불현듯 어제가 그렇게 힘든 것만은 아니었다고 휘파람을 불 수는 있겠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