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미의 사색가들

양화 2006. 2. 27. 13:12

 

 

여기서 기디온의 심리주의적 미학이론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미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예부터 수없이 논의되어 왔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대상에 내재하는 성질로

생각하여 황금률이나 대칭이라는 규칙으로 파악하려 했다. 그러나 기디온은 '아름다움이란

인간의 감정이 그것을 승인하는데서 성립하는 것'이라는 심리주의적 입장에 선다.

......

 

... 새로운 세계가 '아름다운 것'이 되기 위해서는 예술가에 의해 조직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인간의 감정 영역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

 

예술가는 ... 인간과 세계의 새로운 세계를 탐구한다. 예술가의 경우 그와 세계의

관계는 실제적이거나 인식적이기보다 정서적이다. 창조적인 예술가는 환경을

베끼려 하지 않고, 그의 눈을 통해 우리에게 그것을 보이고자 한다....

예술가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외면적인 표상을 찾아 제시한다. 실제로 우리를

사로잡기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혼돈스러울 뿐인 감정, 더구나 그 감정의 혼란 때문에

불안하고 좀처럼 가시지 않는 초조감마저 안겨줄 감정을 위한 외면적인 상징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술가가 현대 사회에서 그 지위를 보존하고

유지하기가 아무리 힘들더라도 우리가 예술가를 필요로 하는 이유다. <공간 시간 건축>

 

미의 사색가들, 다카시나 슈지 지음, p. 265-266

 

일본의 미술사학자 다카시나 슈지는 '명화를 보는 눈'이나 '예술과 패트런' 같은 책을

통해 익숙해진 저자다. 일본책의 특수성 때문인지, 원래 글이 좋은 건지, 아니면 훌륭한

번역자 탓인지, 전문가의 책임에도 문장이 간결하고 어렵지 않아 읽어볼만한 책들이 많다.

'미의 사색가들' 역시 그래서 잡은 책. 그러나 역시 전문가는 전문가. 미술사에 관한 책들

가운데 고전만을 엄선 - 물론 복잡한 기준이 있다 - 하여 책의 개요를 설명한 것인데,

미술사라는 이론에 쌈장 넣고 마늘 넣고, 기타 등등 맛난 것들을 넣어 쌈을 싸서

한 입에 싹 넣어주는 그런 컨셉의 책이라고나 할까. 핵심 내용만 쏙쏙 뽑아

머리에 넣어놨다가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책이다.

 

대학 시절, 좀 있어 보이고 싶어서 혼자서 후배들이랑 미학 세미나를 꾸렸었다.

(혼자 하면 아무래도 책 읽다 졸다 결국 포기할 것 같아서, 후배들을 끌어들인 것이다)

오빠네 대학원 미학기초이론 커리큘럼을 훔쳐다가 칸트 미학이나 헤겔 미학이니

뭐 이런 걸 읽었는데, 당근 한 줄 읽고 두 시간 생각하는 그런 강도의 책이었기 때문에

현재 머리 속에 남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얼기설기 파악한 바로는 미의

본질이 무엇이냐를 놓고 그것이 내용이다, 아니 형식이다 이러면서 맨날 투닥거리는

게 바로 미학사의 실체라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고민의 수위는 한 단계씩 올라가지만 비교적 현대에 드는 1930년대 이후의

미술사가들의 고민도 그런 것인 듯 하다. 기디온의 책을 해설한 19장 내용 가운데 저걸 읽으며

예술가의 임무가 명확해지고, 그에 따라 예술적인 것에 정의도 명확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예술은 삶 자체를 조직하는 상징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말로만 듣던, 엘리 포르, 앙리 포시용, 에르빈 파노프스키, 케네스 클라크, 리오넬로

벤투리, 허버트 리드, 에른스트 카시러 같은 대가들의 맛을 본다는 건 역시, 황홀한 일이었다.

 

허버트 리드의 천재론도 흥미진진. 예술과 사회의 관련성을 고찰하며 예술이라는 상부구조는

경제제도라는 하부구조에 의해 결정된다는 아르놀트 하우저식의 관점과는 달리 그는 "예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천재"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예술이 다른 기술과 확연히 구별되는

것은 그것이 갑작스러운 영광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며 세계의 어두움 속에 비합리적이고

불규칙적인 빛을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예술의 가치는 "예측할 수 없는

우연에 의해 역사의 흐름에 유입된 변덕스러운 뮤지의 하사품"으로 보증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인간의 '평등'을 기본 이념으로 삼는 민주주의 사회는 천재의 등장에

적대적이라는, 충분히 오해를 불러일으킬 법한 주장으로까지 이어진다.

 

"...예술 작품이 개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은 명백하다. .. 예술적 가치는 일반인들의

미적 감수성의 수준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구상된 시대의 가장 세련된 미적

감수성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 능력은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만이 갖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말하고 나면, 오해를 피할 수 없을 것 같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게 아니다. 현대 사회가 천재가 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고, 대신 의사영웅이 등장했고,

그러한 의사영웅을 만들어낸 현대 사회는 '진리'가 사람을 불안하게 하지도, 하기 싫은 생각을

강요하지도 않는다는 위험한 환상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한다. '진리'란 본래 사람을 불안하게

하고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인데, 진짜 예술가는 그걸 전하려 하고 그런 예술가는

대중들의 외면을 당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현대는 진짜 예술하기 힘든 시대라는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에구, 공부 때가 따로 있다더니 했다. 사나흘이면 뗄

분량의 책을 2주일째 붙잡고 앉아 한 줄 읽고 딴생각, 두 줄 읽고 일생각, 세 줄 읽고 집생각

이랬다. 도대체 삶 자체를 조직하는 예술 어쩌구를 읽으면서 머리 한 켠으로는 저녁엔

뭐 해먹나, 애들 피아노 레슨비 내야 되는데, 남편은 어제 왜 삐졌나, 참, 어머님께 전화도

드려야지, 조카가 학교에 입학하는데 선물은 뭘 사야 하나, 냉장고 속에 우유 엎질러 놓은 건

언제 치우나, 김 바를 들기름 사가야지, 지난 구정 때도 못 뵈었는데, 둘째 형님네는 어찌

지내시나, 오빠네는 언제 이사하나, 엄마 허리는 괜찮은가, 그나저나 2월말에 원고는

마감할 수 있을까 뭐 이런 자질구레한 생각을 해야 한다니..

책을 읽다 멍하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책으로 돌아오면 이건 도대체

무슨 소리라냐, 당신은 누구세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에효~

 

* 위의 그림은 왼쪽 터너의 '비, 증기, 스피드', 오른쪽은 모네의 '생 라자르역'.

연기를 품으며 내달리는 무쇠 괴물 기차를 아름다운 것으로 만든 것도 예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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