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안테나가 가리키는 하늘을 보며 반짝이는 별들이 쏟아내는 어마어마한
먼지냄새를 맡으며, 내가 이곳에서 혼자 "나야..."하고 말하면 저 별 어디에서 누군가
울어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스카이 콩콩' 중에서, <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p. 75-76
지난해 송년모임에서 누군가 이 책이 무척 재미있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얼마후 누군가 이 책에 대해 쓴 평을 보았는데, "연민보다 차라리 냉소..." 어쩌구 하는
문구를 스치듯 보고는 볼까, 말까 망설였다. 아시다시피 난 냉소를 무지하게 싫어하는지라.
그러다가, 그냥 읽어버렸다. 결론은 참, 좋았다. 뭐가 좋았냐고 묻는다면.
문장 하나하나 공들여 쓴 것도 좋았고, 선뜻 공감이 가는 여러가지 톡톡 튀는 비유도 좋았고,
곧 웃음이 터질 것처럼 입가에 잔뜩 참고 있는 웃음을 물고 있는 작가의 얼굴도 좋았고,
작가의 말에 "문학이 신앙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 소설 안의 어떤 정직,
그리고 언제나 당신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쓴 것도 정말 좋았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좋았던 건, 이것이 꾀죄죄한 아비마저 잃은 세대에 대해 쓰고 있으면서
청승 떨거나, 원망 하거나, 스스로 연민하거나, 괜히 쿨한 척 하지 않는 거였다.
이 책의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못난 아비를 가진 아들 혹은 딸의 이야기,
고립된 채 현대의 소비자로 살아가는 익명의 사람들.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아들과 딸은 아비를 원망하지 않는다. 고작해야 엄마와 한번 자보려고
죽을힘을 다해 뛴 아버지, 그리곤 훌쩍 사라져 죽은 다음에 편지로나 온 아버지,
딸집에 얹혀 살려고 들어와서는 하루종일, 도 모자라 오밤중까지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는 아버지, <세계의 불가사의> 책 하나 들려주고 아들을 공원에 놓고
사라져버린 아버지, 복어 먹고 자면 죽는다는 실없는 농담이나 해대는 아버지일망정,
그들은 달리는 아버지에게 선글라스를 씌워주고, 용돈을 주고, 수족관 안에서 사랑의
인사를 건넨다. 아버지는 폭죽과 함께 분사되는 불꽃이고, 구부러진 숟가락들을
하늘로 던져 반짝이게 하고, 가출한 아들이 오다 넘어지지 않게 가로등을 고쳐준다.
그럼 그 아들은 딸은 누구인가. 특정 브랜드의 화장지와 생수, 담배를 사는
이름을 알 길 없고 외상도 안 되는 편의점 손님 중의 하나,
다닥한 방에 서로 노크 한번 안 하고 사는, 똑같은 열쇠와
똑같은 가구, 똑같은 소품을 갖추고 사는 사람들, 자기의 동창 근황을 말해도 추억이
나눠지는 서로 모르는 친구들, 그래서 끊임없이 나에 대해 물어야 하는 사람이고,
연결되지도 않는 이야기들을 포스트잇에 적어 금가고 있는 담벼락에 붙여놓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떨어지는 포스트잇을 벽에 대고 엄지손가락을 대고 있는,
아가미처럼 팔딱대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 자주 상상한다. 나는 나에게서 당신만큼 멀리 떨어져
있으니 내가 아무리 나라고 해도 나를 상상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가 상상하는
사람, 그러나 그것이 내 모습인 것이 이상하여 자꾸만 당신의 상상을 빌려오는 사람이다.
...
나는 긴 주소지. 나는 제목만 따라 부르는 팝송, 나는 사진처럼 언제나 조금씩 잘린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했는가 보다, 당신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사람이다. 나는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 나는 뻔한 사람, 그러나 당신이 뻔하다는 사실에 불쾌해지는
사람이다.
...
하여 나는 이 많은 말들 속에서도 당신이 끝끝내 나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다. ... 나는 '그래도 나는'이라고 말한 뒤 주저앉는 사람, 나는 한번 더 '나는'
이라고 말한 뒤 주저앉는 사람, 그러나 나는 멈출 수 없는 사람, 그리하여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자주 생각하는 사람이다'라고 처음부터 다시 말하는 사람이다. 하여, 우리는
흐르는 물에 손을 베이지 않고도 칼을 씻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영원한 화자, p.137-139
다 읽고 나면, 그렇지, 인생 별거 있어? 하면서도 그걸 조용히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도 저 멀리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나를 위해 울어주지 않을까 하면서.
* 실은 12쪽에 나오는 "나는 지금도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은, 나쁘면서도 불쌍하기까지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문장을 읽고 손뼉을 치며 크게 공감하고 박장대소하였다, 는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