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미워하고 때로는 이해불능이었고 때로는 사랑하고 연민했던 아버지에게서 그는 평생 사랑하게 될 일을 물려받았다.
사태는 곧 급변했다. 민심이 히틀러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는지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두고두고 말이 많았다. 생물학자인 내겐 특정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보인다. 메뚜기는 큰 무리를 이루면, 몸의 형태와 색깔, 행동에 변화가 일어나고, 철새처럼 떼지어 이동한다. 이들은 극도로 불안한 행태를 보이고 무섭게 먹어치우며 맹목적으로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인간을 180도 돌변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자극제는 공격받고 있다는 자각이다. 그런 자각이 들면 대열을 좁히고, "적"을 찾아 나선다. 적의 색출은 "우리"와 "저들"을 분리하고, "저들"을 "적"으로 규정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절박한 상황에 처하면 그 책임을 물을 대상을 찾아 나서기 마련이다. 이렇게 혼란과 무질서가 난무할 때 권위 있는 인물이 나타나 질서회복을 약속하는 경우 군중 다수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적이 실재하든 상상의 산물이든, 그 적을 색출하고 없애는 동안 "자유"는 제약당할 수도 있는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이제 마녀사냥이 시작된다. 복종하면 보상이 주어지고, 거역하면 지도자가 쥐고 있는 권력에 정비례하는 보복이 가해진다. p. 176
"코왈레프스키를 빼내려면 내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곳에 당도해 시야에 들어온 광경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머리가 알기 전에 몸이 먼저 알아 이미 덜덜 떨고 있었다. 막 파낸 구덩이에 한 무더기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 학살수용소였다. 고백컨대 너무 무서워서 겨딜 수가 없었다. 도망치려는 내 자신을 억지로 떠밀듯, 말에 박차를 가해 이 아비규환의 책임자가 있을 만한 건물로 나아갔다. 책임자라는 사람은 술에 취해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먹을 곡식과 고기를 생산해야 하는데, 농기구를 만들고 수리할 대장장이가 여기 붙들려 와서 데리러 왔노라고 설명했다. 그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그렇게는 안된다고 했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통하지 않자, 도탄에 빠진 식량 생산을 방해한 죄로 고발하겠다고 거짓 으름장을 놓았다. 이것이 먹혔다. 그때 빼내준 덕분에 코왈레프스키는 목숨을 보전했다. 그 학살수용소의 책임자는 그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p. 189
나는 아버지가 나치당이나 나치 동조단체에 한 번도 가담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얼마나 마음을 놓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만약 가담했다면, 그런 아버지를 원망하고 욕할 수 있을까. 내가 똑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어떻게 했을지 자신이 없다. p. 189
어느날 아버지는 세폴노에 비상물품을 사러 나왔다가 초췌한 몰골에 반쯤 넋이 나간 사람들이 독일군의 감시를 받으며 한 줄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죄수 중 한 명은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갑니다"라고 적힌 포스터를 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모두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 동네에서 장사를 하던 유태인들이었다. 인도에서 그들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한 독일 군인이 옆에 있던 아버지를 바라보더니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라고 비난어린 투로 말했다. 그 눈빛과 말투는 유태인에게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대꾸했다. "독일인이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내 자신이 부끄럽소이다." p. 191 베른트 하인리히 지음, 아버지의 오래된 숲
이성의 세기 이후로도 인간의 역사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된 야만적인 사건들을 수많은 역사가와 철학자, 심리학자가 분석해왔지만 이 생물학적인 설명보다 더 명쾌한 답을 본 적이 없다. 어떤 책도 한 인간이 낼 수 있는 용기가 어떤 것인지도, 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부끄러움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도 이렇게 분명하고 간결하게 전해주지 못했다. 언제나 딛고 넘어서거나 비난이나 연민의 대상, 혹은 조용히 무시당할 수밖에 없었던 전 세대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어떤 것이어야 할지에 대해서도 이렇게 잘 알려주지 못했다. 그것도 온전히 삶을 통해서. 190쪽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기로부터 달아나고 싶었던 아버지가 숨어든 곳은 야생의 자연으로 가득한 추억속이었다"라는 대목을 읽고는 일순 눈물이 핑 돌았다. 6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인데도, 책이 줄어드는 게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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