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사랑을 택했다면 더 행복했을까?

양화 2011. 12. 23. 19:26

중구난방, 읽은 책들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정리해두었는데, 올해부터는 내멋대로 올해의 책.. 이런 제목으로 매년 연말마다 10권 정도 가장 훌륭했던 책들을 꼽아보면 어떨까 한다. 올해에도 침을 튀겨가며 칭찬한 책들이 많지만 10권 정도를 추려둘 수는 있겠지. 내가 출간된 모든 책을 다 읽은 것도 아닌데, 이건 너무 시건방진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은 관두도록 하자고 마음먹었다. 건방져졌다거나 내 안목에 자신이 생겼다거나 한 건 아니고 그냥 이런 책을 읽는 사람, 저런 책을 읽는 사람들이 폭넓게 존재하고 그들이 꼽은 다양한 목록만으로 세상이 좀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올해의 책들은 아마도, 밑줄긋기에 소개된 - 가장 게으른 방식의 독서기록이라 부끄럽지만 올해는 이걸 착실히 적는 것만해도 셀프 쓰다듬을 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자화자찬하고 싶다 - 책들이 다수를 차지하겠다, 다음에 써야지, 써야지 하다가 그냥 넘긴 책들도 많으니 그런 것들의 기억을 불러오자면 그도 쉽지 않을 거 같다. 어쨌든, 내 멋대로 올해의 책 중에 낄 책으로 앤서니 스토의 '고독의 위로'를 빼놓을 수 없겠다. 나중에 한 번 더 읽어보면 좋겠다, 고 생각했지만 그럴리가 없을 테니, 요약 수준의 긴 글을 남기려고 한다.

 

---------------

 

Ilona Wellmann의 'Alone'

 

앤서니 스토의 글은 간결하고 명확한 데다 사려 깊고 아름답다. 적절한 강도의 강조라든가, 그 자리에 맞춤한 인용을 활용하는 솜씨도 수준급이어서 책을 읽는 동안 참 충만하다. 스토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하다. 심리학이나 정신분석에서 인간관계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두고 있다는 것, 사랑과 우정이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 중요한 부분임에는 틀림없지만 세상이 떠드는 것처럼 행복의 유일한 요소는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노년에 이르러서는 더욱 인간관계의 중요성이 덜해지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어쩔 수 없는 이별을 앞두고 그 이별을 덜 고통스럽게 하기 위한 자연의 자비로운 섭리일지 모른다고 한다. 나도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더 나아가 어쩔 수 없이 노년이 되는 사람들이 인간관계라는 게 그렇게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갖고 인간이 아닌 다른 것과 유대감(?)을 맺는 연습을 한다면 여생을 덜 고독하게, 덜 불행하다고 느끼면서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이 책은 뜻밖에도 노년 지침서로서도 톡톡히 역할을 한다. 그는 말한다. 인간의 소명이 단순히 번식이라면(성적 합일을 통한) 왜 인간의 삶은 번식 가능한 시점을 훨씬 넘어서까지 지속될까? 융의 말대로 ""삶의 후반기"라고 정의한 시기에는 어떤 다른 의미와 목적이 있는 게 틀림없다."(31)고.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사랑에 실패하고도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았던 에드워드 기번의 이야기를 하면서 사랑을 잃는다고 행복을 잃는 것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친밀한 애착에 대한 신화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플라톤의 '향연'에 전해지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는 나머지 반쪽을 찾아헤매는 불완전한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프로이트 역시 인간은 사랑을 통해 비로소 전체, 하나가 될 때의 충만함을 평생 추구하며 그런 합일을 통해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추구 옆자리에 똑같은 크기의 갈망이 존재한다고 본다. "사람은 한 평생을 살면서 전혀 다른 두 가지 충동을 느낀다. 다른 이들을 사귀고 사랑을 나누는 등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이들과 가까이 지내고 싶다는 충동이 그 한 가지고,  또 한 가지는 독립적이고 개별적이며 독자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충동이다."(19) 그래서 인간은 자라면서 한편으로는 "우주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다는 감각, 다름 사람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다는 감각"(27)을 추구하지만 한편으로는 "살아있는 존재의 선천적인 특질이 궁극적으로 실현된"(융, 32) 개인성을 추구한다. 그에 따르면 "개성의 본질은 개인이 정신 구조 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힘의 방향을 인정할 때 표현되는 것"(33)이며 사람들이 중년에 이르러 신경증의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스스로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본성이 따르라고 하는 길에서 너무 멀리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개인성의 통합은 융의 여러 치유 경험에서 드러나듯 사랑의 결과로 느껴지는 '대양의 느낌', 완벽한 조화의 느낌, 황홀경과 비슷하다. 그 지속시간이 짧다는 것도 유사하다. 우리는 완전함이라는 활홀경의 감각은 순간적일 수밖에 없다는 숙명 덕에 이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다. 어떤 것에 대한 "갈망이나 전체를 향한 소망과 추구는 뭔가 빠져있다는 깨달음, 불완전함의 인식에서 비롯"(41)되는 거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절대 완성될 수 없어서 평생을 추구해야 하는 우리 삶의 궁극의 임무는 이 개인성의 완성일지 모른다. 저자는 이 개인화 과정, 그로 인한 태도의 변화가 천재들의 창조 과정과 아주 비슷하다고 말한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첫째, 새로운 개념이나 영감이 떠오를 때의 마음 상태가 융이 말한 '적극적 상상'과 유사하다. 둘째, 이질적으로 보이던 실체들을 새로운 고리로 연결한다. 셋째, 창조과정이 일생을 통해 지속된다. 넷째, 창조과정과 개인화 과정 모두 주로 고독 속에서 일어난다. 여기에 그가 말하는 이 책의 핵심적 주제가 있다. 인간에게는 관계뿐만 아니라 관심사가 필요하다. 그리고 관심사를 통해 일체감에 이르기 위해서는 고독이 필요하다.

 

"혼자 있는 능력은 학습과 사고의 혁신을 가능하게 하며 변화를 받아들이게 하고 상상이라는 내면 세계와 늘 접촉하게 하는 귀중한 자질이다. 친밀한 관계를 맺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라 해도 창으적인 상상력의 개발로 치유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인간관계보닫 자신의 삶에서 의미와 질서를 만드는 것에 주로 관심을 기울이는 창의적인 사람들도 많다."(48) 그렇다면 인간관계는 부질없다는 것인가. 스토는 명쾌하게 답한다. "가장 행복한 삶이란 인간관계나 인간관계 이외의 것 어느 한쪽에 대한 관심을 유일한 구원의 수단으로 이사화하지 않는 삶"(49)일 거라고 말이다. 그는 여러 가지 연구를 인용해 애착이 중요한 만큼 한 인간이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 혼자 있는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역설한다. 도널드 W. 위니콧에 따르면 아이가 어릴 때, "엄마가 가까운 곳에 없는 상태에서도 혼자 있는 능력을 키울 때 자기 내면의 진짜 느낌과 접촉하고

그것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능력 또한 키울 수 있다고 말한다. 엄마가 가까운 곳에 있을 때, 그리고 나중에는 엄마가 없을 때도 스스럼없이 아이가 편안하게 혼자 있을 수 있어야만 다른 사람의 기대와 강요에 관계없이 자신이 정말로 필요로 하고 원하는 것을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81)

 

나아가 고독은 본능적인 행동을 지적 행동으로 발전시키는 데도 유용하다. 본능적인 행동을 지적 행동으로 바꾸는 기본 요소는 무엇일까. 행동학자 데이비드 스텐하우스는 다음 세 가지를 꼽는다. 첫째, 이전에는 자극에 본능적으로 반응해 완료 행동으로 끝냈던 개개의 존재가 예전의 방식으로 '반응하지 않을' 능력을 갖추는 것, 둘째, 기능적으로 연관된 항목들을 보관하고 새로운 경험들을 비교 평가할 수 있는 중앙기억저장소를 만드는 것, 셋째, 추상화하고 일반화하는 능력의 개발이다. 이 모든 것은 사고를 통해 가능하며, 강조하지만 사고는 고독한 활동이다. 고독은 학습과 사고, 혁신을 가능하게 하고 자신의 내면세계와 끊임없이 접촉하게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에게 재앙 역시 주었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고독 속의 상상력은 인간을 어떤 환경에든 적응하게 했지만 동시에 만족하는 법을 잊게 했다. 그래서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하고 욕구가 완전하게 충족된 상태라는 의미에서의 '행복'은 잠깐동안만 지속된다."(96) 이것이 바로 저자의 말하는 '신성한 불만'이다. 인간이 현재를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과거와 미래를 연결 짓는 것도 새뮤얼 존슨의 말대로 현재가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프로이트와 의견을 달리 한다. 프로이트가 환각, 꿈, 놀이가 미숙함의 증거이며 인간이 성숙하면 신중한 사고와 이성적인 계획에 따라 적절하게 세상에 적응할 거라고 생각했다. 즉 상상이나 공상은 미숙함의 증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들 내면에 존재하는 공상의 세계는 인간의 생물학적 특질의 일부분이며 이 내면의 세계와 외부 세계 사이의 불가피한 모순 때문에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이 풍부해진다"(101)고 주장한다. 나아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까지 닿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간다운 모습도 잃게"(102) 될 거라고까지 말한다. 고야의 말 그대로다. "공상이 무시된 채 이성만 남으면 괴상한 괴물이 태어난다. 이성과 결합한 공상은 예술의 어머니며 경이로운 예술품의 원천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도록 하는 것은 위니콧의 말에 따르면 "창의적 통각"이다. 창의적 통각은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연결, 외부세계를 상상력으로 따뜻하게 덧칠하는 것과 연관된다. "만일 사람들이 외부세계를 자신이 주체적으로 뭔가를 성취할 수 있는 곳이 아닌 오직 적응해야 하는 곳으로만 여긴다면 그의 개인성은 사라지며 삶은 무의미하고 무익해진다."(110)

 

저자는 거듭 강조한다. "모든 사람은 인간관계뿐 아니라 관심사도 필요로 한다. 관심사도 인간관계 못지 않게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삶의 의미를 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114) 상상력의 산물로서 예술이 공동체의 것에서 개인의 것이 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사람 하나하나가 겪는 개인화 과정의 중요성과 당위성, 의미를 합리화한다. 스토는 예술가의 확실한 자취가 예술품의 가치를 만드는 것처럼 종교도 비슷한 속성이 있다고 파악했다. "완벽이라는 그들의 이상은 속세의 거부, 금욕과 고행, 명상과 엄격한 계율의 고독한 삶의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것이었다."(127) 그러므로 "타인과의 친밀한 애착을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사람의 삶이 꼭 불완전하거나 열등한 것이 아니"며 "혼자서만 느낄 수 있는 충족감도 필요하다."(128-129) 이러한 일반적인 이야기들을 심리적 유형으로 나눈 개개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것이 다음 6장의 내용이다. 5장이 인류의 역사를 통해 한 인간의 몸에 새겨진 보편적인 인간을 그렸다면 6장은 개인의 기질을 인간관계에서 비롯한 경험을 얼마나 가치있게 여기는지에 따라 구분한다. 융의 외향/내향, 알프레트 아들러의 추제/객체, 리암 허드슨의 분산형/집중형, 하워드 가드너의 형태 관심형/이야기 관심형 등으로 나눠지는데, 대체로 내향형/형태관심형/집중형의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고 심지어 사람들을 피하기도 하며 질서를 발견하고 정하는데 관심이 많지만 반대의 경우, 즉, 외향형/이야기관심형/분산형의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나와 우리 아이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특히 어릴 때부터 사람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고,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도 무감각해보이는 동호가 그저 개인적 성향에 불과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걱정함으로써 오히려 아이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 그래서 인간관계가 원만한가 아닌가를 정신건강의 척도를 삼는 기존 관행에 대한 저자의 반박에 안심이 되기도 했다. 고독은 누구나에게 필요하지만 혼자 있으려고 하는 성향의 정도에 따라 문제적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중증은 아닌 것 같지만 어느 정도는 '우울증적 개인성'에 해당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성향의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다른 이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그들에게 비난을 들을 수도 있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회유적인 태도를 취한다. 인정을 받으려면 순종해야 하고 그러려면 진짜 자신은 어느 정도 감춰야 하기 때문에"(151) 시시때때로 혼자 있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나는 다른 감각은 무딘 데, 다른 사람이 언짢아하는 것은 비굴할 정도로 금방 눈치 채는 성향이 있다. 그리고 내 주위의 누군가가 화가 나 있거나 언짢아 있으면 그게 다 내 책임인 것처럼 생각하고 전전긍긍한다. 전전긍긍이 길어지다 보면 나 자신에게 화가 나는 상황이 되는데, 이게 프로이트의 '애도와 우울증'에 나온 바로 스스로에게 퍼붓는 비난의 정체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가족 안에서도 편안하지 않고 가끔은 모든 사람들로부터의 완전한 고립 상태를 갈망한다. 미국에 있을 때, 아이들을 학교 보내놓고 집에 가면 나 혼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나 기타 아무런 관계 맺을 사람이 없었던 상황에서도 겨우 차 한 대 크기의 차고에 들어가 차고 문까지 닫은 어두운 공간에 한참 동안 앉아있곤 했다. 어떤 때라도 내겐 고독이 필요했다. 지금도 필요하다, 간절하게.

 

다음 장에서부터는 고독한 창조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것은 프롤로그 첫 장에 인용한 에드워드 기번의 말과 연결된다. "대화는 서로를 이해하게 하지만, 천재를 만드는 것은 고독이다. 온전한 작품은 한 사람의 예술가가 혼자하는 작업으로 탄생한다" 저자는 단언한다. 창의적인 사람들이 친밀한 관계를 맺을 때 창조의 동력을 얼마간 잃게 된다고. 보들보들한 토끼들의 세상을 창조했던 베아트릭스 포터, 어린 시절 박탈과 불행을 경험했던 조지프 루디야드 키플링, 어린 시절 부모와 사별한 H. H. 먼로, 엘리베이터 보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혼자서 엘리베이터 타는 것을 두려워한 P. G. 우드하우스를 소개했는데, 이들은 모두 어린 시절, 사별이나 시대적 한계로 인해 일찍부터 부모와 헤어져 자랐고 커서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데 서툴렀으며 아이나 동물과 더 잘 지냈다. 그래서 그들은 상상 속의 공간으로 도피하거나 그 안에서 더 편안해했지만 사는 걸 특별하게 불행하게 느끼지는 않았다. 이게 어린 시절의 불행한 환경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어린 시절이 아무리 행복했어도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어느 정도의 성향이기도 하고, 혹은 저자가 '불행한 소명'이라고 부른, 상실과 고립 속에서 싹튼 재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 예술이 박탈에 대한 보상이었거나 말았거나 그들은 "친밀한 애착의 대체물이던 것이 그 무엇 못지 않게 유익하고 재미있는 삶의 방식이 되었다. 그들 삶의 중심이 친밀한 애착이 아니라고 해서 그 삶이 충만하지 않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190)

 

다음 장 8장에서는 상상력이 단순히 불완전한 관계를 보상받으려고 피난처를 짓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이 가치있게 살아가게 만드는 '자아존중감'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다는 느낌이 내면에 확실하게 자리 잡을 때 생긴다. 하지만 그게 유일한 것은 아니다. 사랑받는다는 느낌뿐 아니라 유능하다는 느낌과도 관계된다. 게다가 주로 인간관계에서만 자아존중감을 찾으려 할 때 고통에 취약한 성향이 생겨날 수 있다. "어린아이들이 인간관계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면, 그들의 천재가 아닌 이상, 관심분야의 능력을 개발할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하고 그 결과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200) 이런 이유로 "창조활동은 대응기제, 즉 정서를 표현하는 방법일 뿐만 아니라 통제력을 발휘하는 방법이기도 하다."(201) 더 불행할 수 있었지만 많은 예술가들은 고독 속의 창조작업을 통해 구원받는다. 그들의 예가 이 장에 나온다. 고대 철학자 보이티우스가 철학을 여성으로 의인화한 후 "외부의 대상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는 것은 위험과 착각이 따르는 일"이라는 가르침을 주려했다는 것을 인용해가면서. 하지만 타의에 의한 고독은 다를 수 있음 역시 지적한다. 수감자들과 기타 고문 피험자들이 경험하는 타의적 고독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 자신보다 훨씬 더 강력한 누군가에게 완전하게 의존하고 좌우되는 유아기의 두려움"(233)에 사로잡히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정신붕괴를 막아낸 사람들을 보면, 사소한 결정이라도 스스로 경정할 수 있는 영역을 둠으로써 수감자 스스로가 자신을 독립적인 존재로 인식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좌우했다고 한다. 의사결정 능력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는 것이다. 이건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극한 상황의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 그런 상황을 살아내고도 결국 스스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정신구조를 밝혀내는 데도 도움이 될 만한 팁이다. 또한 감각 박탈 실험을 통해도 수감자와 똑같은, 타의적 고독의 결과가 나타난다. 인간은 "감각을 통해 얻는 정보를 기초로 환경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이해"(238)하기 때문이다. 감각박탈의 실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지적 기능의 퇴보, 둘째, 피암시성의 증가, 셋째, 시각적인, 혹은 청각, 촉각의 환각, 넷째, 공황발작 등이다. 하지만 감각의 일부만 박탈했을 때는 긍정적 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 예로 말년에 청력을 잃은 고야와 베토벤을 들 수 있다. 여든 네 살에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잃은 고야는 이렇게 말한다. "내게 남은 것은 오직 의지뿐이다. 의지는 넘치도록 남아 있다."(244) 보이티우스가 그의 대표작 "철학의 위안"을 쓴 것은 파비아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였고, 헨리 8세 치하에서 왕을 영국 교회의 수장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토마스 모어가 "시련과 위안"을 완성한 것도 감옥에서였다. 도스토예프스키 역시 감옥에 있는 동안 후에 쓴 책들의 영감을 길어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다른 죄수들 틈에서 "정서적으로 고립되고 누구와도 진정으로 교류할 수 없었기에 관심을 자신의 내면으로 돌릴 수 있었으며, 마음이 과거를 여행하도록 풀어놓을 수 있었다"(251) 물론 바람직한 영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히틀러가 "나의 투쟁"을 쓴 것은 감옥 안에서였고, 사드가 문제작들을 쓴 곳도 감옥이었다. 정치적 박해로 감옥에 갇혔던 앤서니 그레이와 아서 케스틀러는 감옥에서의 경험을 "현실에 더 높은 차원의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시간, 그 질서와 접촉할 수 있었던 시간으로 기억한다. 이런 예를 우리나라에서도 숱하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말한다. 삶의 표면 아래 숨어 있는 공포를 더 분명하게 깨닫고, 내면이 자유로워지는 느낌, 궁극적 실재와 직면하는 느낌을. 스토는 단언한다. 악에서 선이 나올 수 있다고. "인간의 정신은 파괴할 수 없는 것이다. 용기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지옥에 있으면서도 천국의 모습을 볼 수 있"다.(254) 예술가뿐만이 아니다. 칸트와 비트겐슈타인 같은 철학자, 과학자인 뉴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 프로이트나 멜라니 클라인이 주장한 '대상 관계 이론'에 대해 쿨하게 수긍한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관계를 맺고 있고, 흥미로우며 자아 존중감도 충족시켜주는 일을 하고 있다면 꼭 가깝고 친밀한 관계가 없다 해도 만족스럽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주장 또한 덧붙이고 싶다."(266) 내게는 구원 같은 말이다!

 

대부분의 심리학자, 정신분석학자들은 관심사를 파생물로 간주하지만 때로는 관심사는 애착관계와 대등하게 다뤄져야 한다. "일, 특히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진보하고 깊이는 더하는 창의적인 일은 한 사람의 개인성 안에서 통합요인을 제공할 수 있다"(266) 예술가들의 표현 양식이란 것은 "개인성의 다양한 부분이 균형있게 결속되어 만들어지는 것이다"(267)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느냐고? "독방감금이나 강제수용소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음악이나 언어, 열정적으로 품고 있는 종교적 또는 정치적 시념 같은 '관심사'가 정신 붕괴와 그 결과로 일어나는 죽음을 막는 역할을 할 수 있"(269)기 때문이다. 모리스 N. 이글이 한 작곡가 이야기를 전하면서 쓴 이 대목도 그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관심사 역시 세상에 존재하는 대상을 인지하고 정서적인 고리를 형성하는 선천적인 성향의 표현이며 인간 발달의 중요하고 독립적인 면이다."(269-270) 그러므로 "이상적으로 균형이 잡힌 사람이라면 인간관계와 관심사 모두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270) 결코 인간관계의 실패가 인생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저자는 창작능력이 '고립 상태에 있는 개인의 발달'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우리 삶의 진전을 다른 사람과 관계된 우리 역할로 정하지만(아이, 청소년, 아내, 남편, 부모,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예술가와 철학자는 스스로 성숙한다. 그들 삶의 진전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보다는 작품 성격의 변화와 작품의 성숙에 따라 정해진다."(270-271)

 

특히 완전하고 영구적인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는 문제를 고민하는 철학자나 위대한 진리 하나에 모든 것에 포섭되는 과학과 달리 복수가 공존하는 미술작품, 문학작품들을 생산하는 예술가들에게서 더 뚜렷한 특징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과학자 부분에서는 동의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 수긍한다. 저자는 칸트와 비트겐슈타인, 뉴턴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에게 아내와 가족이 있었더라면, 그처럼 빛나는 업적을 이루기는 불가능했을 거라고 말한다. "높은 수준의 추상적 개념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의 고독과 강력한 집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290) 이 글의 제목이 그의 결론이다. "만일 그들이 일보다 사랑에서 성취감을 찾을 수 있었다거나 혹은 그러고 싶어 했더라면 더 행복했을까?" 물론 절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의 이야기는 노년으로 넘어간다. 고독은 노년의 친구이니까. 나이가 들수록 정서적인 의존은 줄어든다고 저자는 주장했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노력을 통해서 선취할 수 있는 것이지,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정서적인 의존이 줄어드는 것 같지는 않다. 동서양의 차이일 수도 있겠고. "게다가 노년이 되면 감정이입에서 추상으로 전환하는 경향이 있다. 인생의 이야기에서 관심을 거두고 삶의 형태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294) 나이가 들수록 소설이 재미없어지는 이유일까.

 

스토는 창의적인 사람들이 인생 제3기에서 보여주는 특징을 수많은 음악가들의 말년 작품을 통해 뽑아낸다. 그에 따르면 첫째, 소통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다. 둘째, 전통에 얽매이지 않으며 얼핏 볼 때 굉장히 이질적인 요소들을 새로운 방법으로 통일하려 한다. 셋째, 과장된 표현이나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 넷째, 인간관계의 경험보다 개인 내면의 혹은 개인을 초월하는 경험이라는 외딴 영역을 탐험하는 경향을 보인다.(302) 슈트라우스, 브람스, 베토벤 등 수많은 음악가들의 말년의 작품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지만 음악을 몰라 패스!! 다만, 헨리 제임스의 마지막 시기의 작품을 통해 예술가들이 말년에 자신이 이룬 업적에 도취되기 보다 놓친 기회들을 아쉬워하는 경향을 설명하는 인용문에 공감했다. 그는 '사절들'에서 자신에게 말하듯 이런 말을 썼다. "할 수 있는 한 삶을 즐겨라. 그렇게 못하는 것은 잘못이다. 인생을 맘껏 누린다면, 특별히 무엇을 하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인생을 누리지 못한다면 다른 무엇을 누리겠는가"(312) 육체적 욕망을 억눌러 온 그의 삶, 특별하고 이상한 일이 일어날까 봐 평생을 두려워하느 존 마처의 이야기 '황금의 잔'과도 겹친다. 제임스는 소설가 휴 월폴에게 이렇게 말한다. "피가 뜨거웠던 시절에 저지른 방종은 하나도 후회되지 않는데, 냉담했던 시절에 끌어안지 못한 일들과 가능성들은 후괴가 된다네."(318)

 

마지막 장에서 그는 친밀한 인간관계를 건강과 행복의 기준으로 강조하는 오늘날의 현상에 대해 문화인류학자 에르네스트 겔너의 이야기로 답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인간관계에 몰두하고 걱정하는 것은 이전처럼 예측 불가능하고 위태로운 자연계 때문에 불안해하는 일이 없어졌기 때문"(323)이라고. 스토는 "사랑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로 미화되는 분위기는 위험하다"(333)고 말한다. 정신건강의 구성요소는 프로이트의 말대로 사랑하고 일하는 능력이니까. 애착은 약탈자로부터의 보호라는 원시시대의 기체가 이어진 것이고 우리는 친밀한 관계뿐 아니라 큰 공동체의 일부라고 느끼고 싶어하기도 한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 익숙한 존재 자체가 아니라 서로를 알아봐주고 인정해주는 것, 그리고 비록 보잘것없다고 해도 서로의 삶에 도움이 되도록 지지해주는 것이다."(342) 그는 말한다. "일의 중요성, 사람이 혼자 있을 때 그의 마음속에서 진행되는 정서변화의 중요성, 무엇보다 창의력을 지닌 사람들의 상상력이 발휘되는 중심공간에 대해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친밀한 애착 관계는 삶이 전개도는 하나의 중심축일 뿐, 유일한 중심축은 아니다"(345)라고.

 

틀어박히기 좋아하는 성향,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혼자 있고 싶어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매우 위로가 되는 책이다. 그런 내 성향을 죄책감이나 정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바라보면서 부정하거나 억지로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부질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 것도 좋고. 동호를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 것도 바람직한 결과다. 앤서니 스토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그가 쓴 '창조의 역동성'과 '융'을 주문했다. 시공로고스 총서 가운데 하나였던 융은 어느새 절판. 정가 6500원짜리를 헌책방에서 10,000원 주고 샀다. 

'밑줄긋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식탁 위의 책들이 있는 어린 시절의 서가  (0) 2012.05.31
닉 혼비의 노래(들)  (0) 2012.04.26
진정한 용기와 부끄러움은 어떤 것인가  (0) 2011.12.19
책의 온도  (0) 2011.12.16
늙나 보다  (0) 2011.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