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에 있는 한국 라디오, "라디오 한국"에서 개국 13주년을 맞아 독후감 대회를 연단다. 라디오 한국과 각별한 인연이 있으시다는 한글학교 교장선생님이 권하시기도 했고, 무엇보다 상품이 코스코 상품권이란다. 대상은 800불, 아무리 작은 상이라도 200불.. 이거 있으면 몇 달 장 볼 걱정은 없겠다 싶어 내긴 냈는데, 또 글을 마감이한테 시키는 바람에 좀 엉성한 독후감이 되고 말았다. 여기 올린 건 그나마 매수 제한이 없어 좀 더 손본 것.. 무슨 상인지는 모르겠고 여튼, 상을 받게 되었으니 17일날 받으러 오라고 어제 전화가 왔다. 잘된 일이다. ^^ 대상이 된 책은 오주석 샘이 쓴 '한국의 미 특강'. 한국화를 좀 잘 보고 싶은 사람은 쉽게 입문서로 읽어볼 만한 의미있는 책이다. 마땅한 카테고리가 없어 '한쪽 서평'에 넣었지만 원래 한쪽 서평의 취지와 형식에는 맞지 않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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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기 위해 알기
이언진은 18세기 역관 출신 문인이다. 재능은 차고 넘쳤지만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중인이었던 그는 더 높이 날 수 없어서 평생 불우했다. 스물 일곱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이는 죽기 전 자신이 쓴 모든 글을 불태워버렸지만 아내 덕에 '호동거실'이라는 단 한 권의 시집을 세상에 남길 수 있었다. 그 시집의 100번째 시는 이런 내용이다. "그림 그리면 3분의 진실 드러나거늘/옷 주름과 수염이 그것./그림 안 그리면 10분의 진실 드러나거늘/흰 종이가 곧 부처." 형상 없는 것이 진실을 드러내 보일 수 있다는 의미를 담은 시지만 그림의 10분에 3을 드러내는 것이 옷 주름과 수염이라는 첫 두 행은 우리 옛 그림을 보는 하나의 관점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과연 무엇인지 알리는 데 평생을 바친 미술사학자 오주석 선생이 쓴 '한국의 미 특강'에서 이재 초상을 해설한 부분을 보자.
"... 이 수염의 묘사가 정말 놀랍습니다. 내려오면서 이리저리 꺾어지는가 하면 굵고 가는 낱낱의 수염이 비틀리면서 굵었다 가늘었다 합니다.... 더구나 이 수염들은 그냥 붙어 있는 게 아니라 피부를 뚫고 나왔지요."(171-172) "...몸의 아래 부분만 따로 보더라도 참 기가 막힙니다. 이렇게 옷의 윤곽선과 주름선이 점잖게 흐르는데 부드럽게 반복되면서 음악의 멜로디처럼 운율적으로 흐르죠? 또 슬그머니 점차 선이 굵어집니다. 점점 내려오면서... 그래서 몸 부분의 필선 자체가 선비의 침착하고 온화한 기운을 드러내는 기품이 있죠."(175) 바로 수염과 옷 주름에 관한 이야기다. 조선의 화가는 기능인이라기보다 말하자면 르네상스맨이었다. 문학과 역사와 철학을 갖춰야 하고, 거기다 서예와 그림까지 갖춰야 제대로 된 선비로 대접받았다. 입신에 좌절한 중인이었지만 선비를 추구했던 이언진이 그림이 어떻게 진실을 드러낼 수 있는지 시에 쓸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근대 서양화에 익숙해진 우리 눈에 옛 초상화는 원근법이 없어 공간감이나 입체감 없이 밋밋하다. 또 얼굴은 수염 한 올 한 올까지 세세한데, 옷은 휙휙 쉽게 그린 선 몇 개로 처리해버린 것 같아 불균형적이고 때로는 성의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서양화를 보는 눈을 감고 우리 그림을 보는 눈을 뜨면 그 그림은 달리 보인다. 그래서 우리 옛 미술품 속에서 '한국의 미'를 제대로 찾아보려면 먼저 우리 옛 그림, 옛 미술품을 보는 눈을 갖춰야 한다. 그러므로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의 첫 강의가 옛 그림을 감상하기 위한 원칙으로 시작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저자는 이 장에서 "옛 사람의 눈으로 보고, 옛 사람의 마음으로 느낀다"는 원칙을 내놓았다. 물론 여기에는 예술을 감상하는 만국공용의 원칙인 예술작품을 눈으로만이 아니라 영혼으로 깊이 느끼고 즐겨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예술품을 감상하는 태도에 대해 말한다. 그림의 크기가 각기 다르고 사람마다 감동하는 부분이 다른데, 똑같은 거리와 태도를 유지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다. 저자가 제안한 실용적인 팁은 일단 그림을 감상하는 거리 부분이다.그림 크기를 대각선으로 가늠한 후 그에 1.5배 거리를 유지한 채 감상할 것, 그리고 덧붙여 작품에 마음이 움직였다면 시간을 들여 감상할 것. 이런 태도는 단지 우리 그림뿐 아니라 모든 예술품을 감상하는 데 적용되는 감상법일 게다.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 바로 핵심인 옛 사람의 마음과 눈으로 보는 것이다. 옛 사람은 그림이나 글씨를 볼 때 우리와는 다른 시선으로 보았다. 이른바 도상(우리나라의 도상은 대개 한자어의 동음을 활용한 것들이다. 가령 게가 갈대꽃을 붙잡고 있는 그림에서 갈대꽃은 과거급제를 뜻하는데, 갈대꽃 로(蘆)가 과거에 급제한 선비에게 임금님이 주는 고기 려(려)와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게가 두 마리라면 소과, 대과에 다 합격하라는 뜻이고, 게의 등껍질은 딱딱하니 갑(甲)이고, 이것은 장원급제를 의미한다는 식이다. 이밖에도 고양이는 칠십 노인을, 나비는 팔십 노인, 돌멩이는 장수, 패랭이는 청춘, 제비꽃은 일이 뜻대로 잘 되라는 기원을 담는다고 한다)이라고 하는 내밀한 차이는 덮어두고 우선 외면적, 물리적 차이부터.
가장 기본이 되는 건 시선의 움직임이다. 지금은 가로쓰기가 일반적이기 때문에 그림을 볼 때도 시선이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움직이지만 옛 사람들은 세로쓰기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그림을 그릴 때 감상자의 시선이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움직일 것을 감안해 그렸다. 그렇기 때문에 옛 그림을 볼 때 우리 눈길의 움직임은 달라야 한다. 이런 시선의 움직임을 따라 저자는 옛 그림을 찬찬히 읽어준다. 우리가 자주 접해 친근한 김홍도 풍속화 '씨름'을 제일 먼저 예로 들었는데, 저자의 조근조근한 설명을 따라가다 보니, 그림이 완전히 달리 보인다. 스무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표정과 몸짓으로 누가 누굴 응원하는지, 턱을 괸 사람을 보고 씨름이 시작된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있다. 갓의 모양을 보고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도 알고, 구경꾼 가운데 여성이 하나도 없다는 것으로 당시의 사회풍속도 짐작해볼 수 있다. 다음 차례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긴장된 모습, 구경꾼들을 상대로 엿을 팔아 쏠쏠한 재미를 본 엿장수의 미소에 마음까지 넉넉해진다. 치밀하게 계산된 여백과 구도는 이제까지 느끼지 못했던 그림의 리듬감까지 깨닫게 한다. 어떤 놀라운 기술로 화면을 가득 채웠느냐보다 "뭐가 없어져야 좋은 그림이 되는지를 생각하는 이런 여유와 멋"(69)은 우리 그림의 특별한 멋이다.
우리 그림을 마음으로 읽기 위해 눈에 더해 또 하나, 옛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 그건 이해가 필요한 일인데, 동아시아 문화 전반을 지배했던 생각의 틀, 사고방식을 아는 일이다. 바로 음양오행(陰陽五行). 동양문화의 저변을 이뤄온 철학의 정수인 "주역"의 근간이 되는 사상이다. 음양오행은 넓게 보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에너지의 역동적인 움직임이다. 어찌 보면 밋밋하고 심심해보이는 우리 그림 안에 숨어있는 역동성의 바탕이 바로 이 음양오행이다. 단원의 호랑이 그림, '송하맹호도', 그보다 어줍잖아 보이는 민화의 호랑이는 둘 다 그 안에 역동성이 숨겨진, 통째로 살아있는 그림이다. 음양오행, 에너지의 흐름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태극 문양. 태극 문양에 대한 살뜰한 설명도 일품이지만 정선의 '금강전도'에 그려진 일만 이천 봉이 신묘하게 태극 문양의 구도를 가지고 있는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으로 엮어낸 것도 장관이다.
눈앞에서 보는 듯 생생한 저자의 특강을 듣노라면 마음 한켠에 아쉬움과 죄책감이 가득 찬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고흐를 사랑하고 알려고 했던 것만큼 우리가 우리 그림을 알고 싶어했던가 싶어서. 어쩌면 저자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도 이 말이었는지,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참아두었던 이런 마음은 폭발적으로 드러낸다. 우리가 가졌던 문화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취급해 왔는지 분노와 안타까움이 뚝뚝 떨어진다. 30년이 넘는 일제강점기, 혼란의 현대사를 겪는 동안 우리는 우리 문화의 본래 모습을 바로 볼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초상화, 저자가 우리 문화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주기 위해 마지막으로 선택한 소재는 우리 문인의 초상화다. '터럭 한 오라기가 달라도 다른 사람'이라는 엄정한 회화 정신으로 그려낸 초상화. 영의정을 지냈던 채제공 어른은 초상화 속에서 여전히 사팔뜨기이고, 조선 후기에 덕이 높았던 문신 이채는 검버섯과 노인성 지방종까지 버젓한 영락없는 노인의 얼굴이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은 흉해보이지 않는다. 그들 외모의 미추보다 눈빛과 단정한 태도를 통해 그의 살아온 삶을 정직하게 그렸기 때문이다. 아름다움보다 귀하고 중한 것은 참된 것. 그것이 우리 옛 그림의 핵심이다. 그 얼굴이 어찌나 사실적인지 단지 그림의 얼굴만 꼼꼼히 들여다 보아도 그가 어떤 병을 앓았는지, 어디가 안 좋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라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자랑처럼 슬쩍 흘려놓았다. 중국이나 서양의 초상화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면서.
제국주의 역사상 가장 잔혹했다던 일본 강점기 36년 동안 일제는 집요하게 우리 역사와 문화에 자부심을 갖지 못하도록 교육했고,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전쟁과 빈곤에 시달려야 했던 엄혹했던 현대사 초기에는 우리가 무엇을 가졌는지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 그 과정에서 무엇을 얼마나 어디로 빼앗겼는지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림이나 도자기를 잃은 것은 어쩌면 가장 적은 것을 잃은 것일지도 모른다. 더 애통한 것은 그 과정을 통해 우리 문화의 가치를 알아보는 눈과 마음을 잃었다는 게 아닐까. 저자는 '송하맹호도'와 친일 화가였던 김은호가 그린 호랑이 그림을 비교하면서, 또 우리 옛 초상화와 김은호가 그린, 정신은 쏙 빠진 채 곱기만 한 논개와 춘향의 초상화를 비교하면서 안타까워하고 분노한다. "알면 사랑하게 된다"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은 "우리 문화유산 답사기"에 나온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은 아직 우리가 가진 것의 가치를 잘 알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위해 이렇게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사랑하려면 알아야 한다"로. 저자는 그 말을 이렇게 한다. "문화재의 값이라는 것은 어떻게 매겨질까요? 그 문화재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후손들이... 얼마나 자기 문화를 사랑하는가에 의해서 결정됩니다"(168) 라고. 사랑하기 위해 알기,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은 그 훌륭한 첫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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