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이런 집

양화 2008. 9. 17. 13:29

 

 

멕시코 건축가 루이스 바라간의 자택

 

가스통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락방은 몽상을 키우고 몽상가는 다락방에 숨어든다."

집 안 어딘가에는 자신의 꿈을 키우고 혼자서 마음껏 이런 저런 몽상에 빠져들 수 있는 공간, 적당히 어둡고 구석진 특별한 공간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p. 46-47

 

그 영화 속에는 촬영 당시 아마 아흔 살은 되었을 미국의 명배우 릴리언 기시가 방에서 나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천천히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흡사 백 년 전부터 계속 그랬을 것 같은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낡은 가구의 먼지를 훔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래된 집에서 오래된 가구들과 평생을 함께했을 그녀의 익숙한 몸짓이 제 기억 속에 아련히 남아 있어, 시간이 갈수록 아름다워지는 것의 대명사처럼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p. 131

 

불빛은 어둠 혹은 그늘과 함께해야만 그 의미가 만들어집니다. 제가 그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한 것은 이십 대가 끝나갈 무렵, 벽난로가 있는 산장에서 고요하고 차분한 밤을 몇 번인가 보내고 난 뒤였습니다.

그 산장의 천장에는 조명기구가 하나도 없었고, 불빛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난로와 겨우 책을 읽는 밝기의 스탠드가 전부였습니다. 어두컴컴한 실내 구석에는 흡사 살아있는 생물처럼 어둠이 웅크리고 있는 듯 느껴졌습니다. 장작을 난로에 집어넣으면 동굴의 내부 같던 실내에 따뜻한 장작이 타오르며 만들어내는 불빛으로 인해 더 깊은 안락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산장의 밤이 서서히 깊어지고, 그날 밤 마지막 장작을 난로에 던져넣습니다. 조용히 타오르던 장작이 전부 타 재로 변하고 난로에 불빛이 사라지는 순간, 바로 그때가 말 그대로 소등의 시간입니다. 모두가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된 것이지요.  p. 150

 

집을 생각한다, 나카무라 요시후미 지음

 

일본의 건축가 나카무리 요시후미는 좋은 집의 조건으로 모두 12개를 꼽았다. 첫째, 풍경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집, 둘째 알맹이만 적절하게 남긴 원룸 구조, 편안하게 머무를 수 있는 안락함, 집의 중심에 불이 있어야 하고, 작고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있는 여유있는 집, 아름답게 어질러져있는 부엌, 아이들의 꿈이 커가는 집, 손에서 자라난 애착이랄 수 있는 감촉이 좋은 집, 적당한 격식과 효과적인 장식이 있는 집, 가구와 함께 어울리는 집, 오래도록 함께할 수 있는 집, 채광과 조명이 좋은 집 등이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지만, 그 말을 실제로 구현해온 건축가에게는 말은 누가 못해 라거나 누가 그런 집이 좋은 줄 몰라 하고 콧방귀 뀔 수 없는 진실함이 담겨있다. 이 책을 넘기다 이거 꼭 내가 나중에 살게 될 집에 구현하고 싶은 건데.. 싶은 걸 밑줄 긋거나 사진을 마음에 담아두는 것만으로 마음이 뿌듯해진다. 내겐 옮겨놓은 위의 구절들이 그러했으며, 다다미 한 장으로 자투리 공간에 만든 아늑한 느낌의 책 읽는 방(책 50쪽)이 그러했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 마음에 든 것은 저자가 문학작품 속에서 찾아낸 이상적 집안 풍경을 읽는 재미다.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에서 고아였던 주인공 주디 애벗이 친구 집에 놀러가서 묘사하는 집의 풍경, 야마모토 슈고로의 '계절이 없는 거리'에 수록된 '단바 씨'의 한 장면 같은 거 말이다.

 

건축가의 눈에는 책 속에서도 그런 것만이 눈에 띄는 모양일까. 책에서 만난 내 맘에 드는 이상적 집의 모습을 부분부분 모았다가 건축가에게 주면 내가 그리는 그런 집을 만들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마음이 흐뭇해졌다. 누구라도, 이 책을 읽는 동안 자신이 살고 싶은, 확장된 자아로서의 자신의 집을 한 채쯤 마음에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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