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대보다는 우월하지만 자기 자신보다는 열등하며, 매우 견고하면서도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는 불안해하고, 자신의 힘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그것을 두려워하는 시대라는 표현 말이다. p. 51
세계는 우리 삶의 가능성을 적어놓은 목록이다. p. 57
대중은 삶의 계획이 없이 표류하는 인간이다. 그래서 그의 가능성과 권력이 아무리 막대하다 할지라도 아무것도 건설하지 않는다. p. 68
대중의 반역,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아주 작고 얇은 책인데, 한 달 동안이나 읽었다. 문장 하나의 무게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책은 읽고나면 언제나 많은 깨달음과 생각할 거리를 남겨준다. 그래서 뿌듯하고 행복하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20세기 초반 - 거의 19세기에 가까운 - 에 간파한 대중사회의 면모는 너무 정확한 분석이라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짧은 책이어서 그 인상은 더 강렬하다.
그는 앞으로 탄생할 대중들의 모습을 이렇게 정의했다. 첫째 물질적 편의, 둘째 안락함과 공공질서, 셋째, 법앞의 평등을 들었다. 또한 이들은 심리적으로 삶의 욕망, 즉 개성을 무한히 확대하면서 동시에 생활의 편의를 가져온 모든 것에 대해 철저히 배은망덕한 태도를 보인다. 19세기까지 한마디로 삶은 삶다웠다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원래 영원한 긴장의 연속이며 끊임없는 훈련인데, 지금의 대중은 외부의 힘이 탈출을 강제하지 않는 한 정지 상태로 자기 자신을 격리시킨 채 언제까지나 그 속에 안주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은 결코 자신들이 비범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법앞의 평등처럼 오히려 평범함의 권리, 권리로서의 평범함을 선언하고 그것을 사회나 타인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강요한다. 그래서 대중들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매우 분명한 자기의 '견해'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 견해는 진리를 위협한다.
왜 그런가. 견해는 좋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견해는 진리를 구하고 진리가 요구하는 이른바 치열함을 거친 것이 아니다. 절차와 규칙, 예의, 간접적인 방법, 정의, 이성 같은 문명은 타인을 고려하려는 기본적인 욕구로부터 만들어진 것이지만 이 공존의 의지는 오늘날 공적 권위를 제압한 대중에게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자들과는 공존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월드컵이나 디워에서 민족주의를 덜어내면 이 대중의 모습이 너무 분명하게 보인다. 그 심리적 기제에는 '자만에 빠진 철부지'가 담겨있다.
대중의 심리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점을 발견할 수 있다. (1) 선천적이고 근본적으로 삶이란 수월하고 풍요로우며 비극적 제한이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따라서 평균인은 그 내면에 지배의식과 승리감을 갖고 있다. (2) 이런 지배의식과 승리감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게 해주고, 그의 도덕적, 지적 자산을 완벽하고 훌륭한 것처럼 여기게 만든다. 이런 자기 만족이 외부의 견해 일체를 거부하게 하고 귀기울이지 않게 하며, 자신의 의견은 의문시하지 않은 채 다른 의견을 무시하게 만든다. 그 내면에 있는 지배의식은 끊임없이 그를 부추겨 지배력을 행사하게 한다. 그리하여 세상에는 마치 자신과 자신의 동료만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3) 그 결과 신중함이나 심사숙고, 절차나 유보도 없이 '직접행동' 체계에 따라 매사에 개입해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킨다. p. 133-134
인류의 역사가 발달하면서 여러 가지 편리한 시스템 속에 살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본질 자체와 더이상 접촉할 수 없게 되었고, 그 결과 대중은 이런 철부지가 된 것이다. 문명이 타인과의 공존의지를 통해 일궈온 자유민주주의가 대중들의 이런 조건을 만들어냈다면 다른 한 축은 기술이다. 과거의 과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이 연결된 통합된 것이었다면 20세기를 지나면서 과학자들은 연구영역을 점점 좁혀왔고 그 결과 다른 분야의 과학이나 통합적 우주 해석과는 접촉을 점차 상실해갔다. 19세기 이전의 지식인들은 지식 전반에 대한 욕망(딜레탄티즘)을 갖고 있었지만 지금의 과학자들은 무식한 지식인이 되었다.
새로운 청년의 출현으로 인한 사회의 노화는 건강한 것이다. 그리고 지배와 복종의 기능은 어느 사회에서나 중요하다. 하지만 부당한 것으로 보이는 것과 변칙적인 것을 상습적이고 체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타락이다.
"인간의 삶이란 영광스러운 것이든 소박한 것이든, 찬란한 운명이든 평범한 운명이든, 본질적으로 뭔가에 자신을 바쳐야 한다. 이것은 이상하긴 하지만 우리의 실존에 새겨진 피할 수 없는 조건이다. 삶이란 한편으로는 각 개인이 자신을 위해 그리고 자신 때문에 행하는 그 무엇이다." p.195
대중의 삶이 걱정스러운 것은 그것이 더이상 창조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삶은 수준높은 위생과 위대한 품성, 그리고 존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끊임없는 자극 체제를 전제로 한다. 창조적인 삶은 정력적인 삶이고 정력적인 삶이란 ... 지배하거나 복종하거나 둘 중 하나다. 여기서 복종한다는 것은 잠자코 지내는 것이 아니고 - 잠자코 지낸다는 것은 비천한 것이다 - 그와 반대로 지배자를 존중하고 그를 추종하며 그와 연대책임을 지고 그의 깃발 아래 열정적으로 동참하는 것이다."(p. 199-200)
이 대목에서 당시에 떠오르던 국가 파시즘에 대한 진단도 나온다. 민족의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국가의 본질적인 내부는 공동사업을 통한 전면적인 공동생활 계획, 이 사업에 대한 사람들의 지지로 구성된다. 고대국가는 상이한 집단들에 대한 국가의 외압에 의해 통일이 이루어지고 유지된 반면, 국민국가는 '국민들'이라는 자발적이고 뿌리 깊은 응집력에서 국가의 활력이 솟아난다. 서구의 국민국가들이 이 본질에 충실하면 곧 거대한 대륙국가로 정제되어 갈 것이다. 유럽연합의 예언이다.
전에 슈테판 츠바이크의 자서전을 읽을 때도 그랬고, 이 책도 그렇고 유럽인들이 갖고 있는 이 교양있는 자긍심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생각하게 된다. 그럼, 동양은? 아직 알고 싶은 것이 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