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서평

저녁의 무늬

양화 2006. 8. 20. 06:53

 

박형준 지음/현대문학/220면/2003

'저녁의 무늬', 그 제목을 읊조리면, 천생 시인이 붙인 제목이라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일찍이 시인 남진우가 노래한 '저녁빛' 역시 "초라한 방안의 책과 옷가지를 비추며 기나긴 하루의 노역이 끝났"음을 알렸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울먹임에 귀 기울이"게 하던 것이었죠. 그런 저녁에 무늬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일까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인간에게는 해질녘이 되면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이브닝 하트브레이크'라는 마음상태가 있다죠?

시인 박형준의 저녁도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시인으로 등단한 후 조금씩 써온 산문들은 기억이라는 닫힌 문 안에 들어가 있는 마른 나뭇잎 같은 추억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녁은 지혜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저녁의 무늬로 새겨지고 싶다는 소망, 아름드리로 자란 나무의 나이테처럼 자르지 않고도 짐작할 수 있는 깊이와 두께를 가진 인간으로 성장하고 싶다는 바람이 그의 추억 속에 켜켜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이사가 잦았던 도시 변두리의 어쩐지 고달픈 삶이 있고, 자신의 삶의 든든한 뿌리가 되어준 어머니가 있고, 가난했던 옴팍집의 시골 풍경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보낸 편지를 그대로 옮긴 몇몇 대목은 단순하고 소박해서 삶의 진리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청결 마음으로 부지른하고 열심히 일하고 셰상 물정 모르고 허랑망탕 말고 학교 끈나고 햇찰하지 말고" 하는 당부를 보면, 우리의 마음에도 단단히 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기 연민도 지나치면 진력이 나는 법입니다. 시인 자신에게는 비애나 연민이 힘이 되고 위안이 될 수 있겠으나 그런 기억과 마음을 공유하지 못하는 독자에게는 그저 그런 넋두리로밖에는 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타오르다 꺼져간 유성을 보며 멸망의 유희를 즐기며 시를 쓰다가 순교하겠다는 그의 말은 혼자서 중얼거리는 독백처럼 들립니다. 시라면, 그것은 빛날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제게 산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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