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연암을 읽읍시다!

양화 2006. 6. 2. 14:37

 

"'고(古)'란 무엇인가.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부분이며, 그 점에서 하나의 '지속'이다.  우리는 이 지속성 속에서 잃었던 자기 자신을 환기하고 소중한 자신의 일부를 되찾을 수 있으며, 자신의 오랜 기억과 대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는 진정한 자기회귀의 본질적 계기가 된다. 진정한 자기회귀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를 긍정하되 자기에 갇히지 않고, 잃어버린 것을 통해 자기를 재창조해내는 과정이다. 이 점에서 '고'는 한갓 복원이나 찬탄의 대상이 아니라, '오래된 미래를 찾아나가는 심오한 정신의 어떤 행로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의미의 '고'의 탐구다." p. 5

 

오랫동안 연암을 연구해온 박희병 선생이 군더더기 없이 그야말로 '연암을 읽은' 책을 마침내 펴냈다. 이 책을 써야만 했던 선생의 마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 단락은 말해준다. 더 파고들자면,

 

"한국에는 지금도 호가호위적 학문과 호가호위적 글쓰기가 횡행하고 있다. 연암이 말한 바와 다른 게 있다면 모방과 표절의 대상이 중국 책에서 서양 책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아무 차이가 없다. 데리다가 유행하면 데리다를 흉내 내서 말한다. 들뢰즈나 푸코를 베끼는데 열심인 사람도 있다. 심지어는 연암 읽기도 포스트모더니즘의 권위를 빌려서 한다. 그럼에도 자기가 뭐라도 된 것처럼 우쭐거린다. 모방은 아무리 잘해 봐야 모방일 뿐, 창조는 아니다. 앵무새가 사람으로 화(化)할 리가 있는가"        p. 387

 

"사족이지만 한마디 덧붙인다. 이 단락의 나비 잡는 아이의 비유를 시니피앙(記標)과 시니피에(記義)의 관계로 설명하거나 데리다의 차연(差延, differance) 개념을 빌려와 '대상을 글로 포착했다 싶으면 대상은 한순간 벌써 미끄러져 나가 버린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야단스럽게 해석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이는 망발이다. 식자우환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한문 문리도 부족하고, 문맥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으며, 생각도 짧고, 동아시아 문화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다. 이를 메우기 위해 함부로 외국의 권위에 기대고 있으나, 맞지 않은 옷을 걸치고 있는 형국이라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이러니 우리 학문이 여전히 식민성을 못 벗었다는 게 아닌가." p. 445

 

아무래도 비분강개하신 것 같다. 이 대목을 읽고 가슴이 뜨끔 아플 사람 많겠다. ^^

 

이 책을 읽는 동안 책이 줄어드는 게 아까워 괜히 다른 책을 배회하며 읽었다. 연암의 글은 아름다운가 하면 날카롭고, 날카로운가 하면 눙치고, 눙치는가 하면 정확하고, 정확한가 하면 독창적이고, 독창적인가 하면 또 따뜻하다. 연암의 글을 먼저 내놓고 그 뒤에 그 글을 단락 구분하여 하나하나 주해와 평설을 붙이고, 마지막에 총평을 붙인 방식도 참 좋다. 글을 하나하나 음미할 수 있게 하고 세세한 주변 정황이 그 의미를 더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정성스러운 번역의 유려함은 말할 것도 없고!!

 

누이와 형수의 묘지명에서는 더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고, 친구를 잃은 아픔과 친구들과의 한바탕 추억을 이야기할 때는 벗에 대해 생각했다. 각종 책의 서문과 어떤 집의 기문 등을 보면서는 글쓰기와 글읽기, 학문하는 자세에 대해 생각했다. 격식이 정해진 글을 쓸 때의 파격이 얼마나 멋진지, 참신한 비유들은 또 얼마나 머리를 환하게 하던지. 연암의 글에는 밑줄을 긋지 못했다. 몇 줄만 떼어낸다는 것이 참으로 무람스러웠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직접 사서 읽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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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에게 보낸 답장 1

 

"이별의 말은 정다웠지만, 옛말에 '천리 밖까지 따라가 배울할지라도 끝내는 헤어져야 한다'고 했거늘 어쩌겠습니까. 다만 한 가닥 아쉬운 마음이 떠나지 않고 착 달라붙어 있어, 어디서 오는지 자취가 없건만 사라지고 나면 삼삼히 눈에 아른거리는 저 허공 속의 꽃 같사외다.

지난 번 백화암(白華菴 : 이 '菴'자가 맞나? 庵자 아닌가?)에 앉아 있을 때 일이외다. 암주(菴主)인 처화(處華)가 멀리 마을에서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를 듣고는 비구 영탁(靈托)에게 이렇게 게(偈)를 읊더이다.

"탁탁 하는 방망이 소리와 툭툭 하는 다듬잇돌 소리, 어느 것이 먼저인고?"

그러자 영탁은 합장하며 이렇게 말했사외다.

"먼저도 없고 나중도 없으니 그 사이에서 소리가 들리옵나이다."

어제 당신께서는 정자 위에서 난간을 배회하셨고, 저 역시 다리 곁에 말을 세우고는 차마 떠나지 못했으니, 서로간의 거리가 아마 한 마장쯤 됐을 거외다. 모르긴 해도 우리가 서로 바라본 곳은 당신과 제가 있던 그 사이 어디쯤이 아닐까 하외다."

 

경지에게 보낸 답장 2

 

정밀하고 부지런히 글을 읽은 이로 포희씨(包犧氏)만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글의 정신과 뜻이 천지 사방에 펼쳐 있고 만물에 두루 있으니, 천지 사방과 만물은 글자로 쓰지 않은 글자이며, 문장으로 적지 않은 문장일 거외다. 후세에 글을 부지런히 읽기로 호가 난 사람들은 기껏 거친 마음과 얕은 식견으로 말라붙은 먹과 문드러진 종이 사이를 흐리멍덩한 눈으로 보면서 하찮은 글귀나 주워 모은 데 불과하외다. 이는 이른바 술지게미 먹고서 취해 죽겠다고 하는 격이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저 하늘을 날아가며 우는 새는 얼마나 생기가 있습니까? 그렇건만 적막하게도 새'조'(鳥)자 한 글자로 그것을 말살하여 새의 고운 빛깔을 없애 버리고 그 울음소리마저 지워 버리지요. 이는 마을 모임에 가는 촌 늙은이의 지팡이 머리에 새겨진 새 모양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새 '조'자의 진부함이 싫어 산뜻한 느낌을 내고자 새'조'자 대신에 새 '금'(禽)자를 쓰기도 하지만, 이는 책만 읽고서 문장을 짓는 자들의 잘못이라 할 거외다.

아침에 일어나니 푸른 나무 그늘이 드리운 뜨락에 여름새들이 찍찍 짹짹 울고 있더이다. 나는 부채를 들어 책상을 치며 이렇게 외쳤소이다.

"저것들이야말로 '날아가고 날아온다'라는 문자이고, '서로 울며 화답한다'라는 문장이다! 갖가지 아름다운 문채(文彩)를 문장이라고 한다면 저보다 더 나은 문장은 없으리라. 오늘 나는 진정한 글읽기를 했노라!"

 

경지에게 보낸 답장 3

 

그대는 태사공(太史公)의 '사기'를 읽었으되 그 글만 읽었을 뿐 그 마음은 읽지 못했사외다. 왜냐고요? '항우본기(項羽本紀)'를 읽을 땐 제후들의 군대가 자신의 보루에서 초나라 군대의 전투를 구경하던 광경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느니, '자객열전(刺客列傳)'을 읽을 땐 고점리(高漸離)가 축(筑)을 타던 장면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느니 하는 따위의 말은, 늙은 서생의 케케묵은 말일 뿐이니, 부엌에서 숟가락 줍는 것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어린아이가 나비를 잡은 광경을 보면 사마천의 마음을 알 수 있사외다. 앞다리는 반쯤 꿇고 뒷다리는 비스듬히 발꿈치를 들고서는 손가락을 '丫'아 자 모양으로 하여 살금살금 다가가 잡을까 말까 주저하는 순간, 나비는 그만 싹 날아가 버리외다. 사방을 돌아봐도 아무도 없자 씩 웃고 나서 부끄럽기도 하고 분이 나기도 하나니, 이것이 바로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의 마음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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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와 글읽기, 그리고 우정에 대한 간결하고 강렬한 글을 옮겨보았다. 이건 글쎄, 새발의 피라니까요. '연암을 읽는다'가 시리즈로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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