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의무란 본디 아이들에게 읽는 법을 가르치고 문학을 일깨워줌으로써,
아이들 스스로 자유롭게 '책의 필요성' 여부를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어떤 사람이 독서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가 독서로부터 배척당하거나 그렇게 느끼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책으로부터 소외된다는 것은 - 읽지 않아도 사는 데 조금도 지장을 주지 않을
책일지라도 - 그보다 더한 고독은 없을 만큼 절대적인 고독이자 크나큰 슬픔이다.
소설처럼, 다니엘 페나크 지음, p. 195-196
'무지는 죄인가 아닌가' 등의 문제를 낸다는 바칼로레아의 나라 프랑스도 아이들이
독서를 하지 않는다고 아우성이고, 입시 위주의 학교 교육의 폐해가 만만치 않다니,
약간 안심이 된다. 중등학교 교사이기도 한 작가의 말이니 믿어도 될 것이다.
'소설처럼'은 전국의 학부모와 교사들의 필독 권장도서로 지정해야 할만큼 독서교육에
관한한 구절구절 수긍이 가는 말로 가득 차 있다.
그 요체는 한마디로 아이들을 '이야기의 바다에 빠뜨리라'는 것이다.
읽어주고 또 읽어주며, 들려주고 또 들려주라, 그러면 어느 순간 아이들은(어른들도 물론)
독서를 모르던 시기의 크나큰 슬픔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거다.
교사는 책을 한 권 꺼내 아이들에게 읽어주라, 아이들은 글자를 읽는 노동,
의미를 헤아려야 하는 고통에서 벗어나 자연스레 이야기에 빠져든다.
더러 조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업 종과 함께 깨어난 아이는
"에이, 잠 들었잖아. 그래서 그 집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거야?"
이 아이가 자기가 잠든 사이에 지나간 다음 장면을 궁금해 하면서도
그 책을 읽지 않을 확률은? 모르긴 해도 낮을 것이다.
지난번 '책과 바람난 여자'의 처방도 그랬고, 이번 씨네 21에 소설가 김영하가 추천한
방법도 그렇고, 제일 좋은 방법은 독서를 금지하는 것이다.
"나이도 어린 것이 어디 감히 책을..." 하며 서재방에 자물쇠를 달면 아이들은
도대체 거기에 무엇이 있길래, 하면서 호시탐탐 책을 읽으려 할 것이라는 것이다.
책을 가득 채운 지당한 말씀 혹은 깨달음의 말씀들 가운데서도 저 구절이 눈에 띈 것은
아이들에게 책을 권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꼭 집어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것이다. 독서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아이가 선택할 문제다.
독서가 가져다줄 가시적 이익만을 헤아리며
빚쟁이 빚독촉하듯 독서를 강요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독서의 즐거움으로부터 아이를 소외시키지 말자는 것이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