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일기

쪼잔한 편집자 vs. 대범한 기획자

양화 2009. 4. 6. 13:51

기획한답시고 지난해에 전혀 성과를 내지 못해 은근 마음의 압박과 부담을 안고 있었는데, 올초가 되니, 그 기획들이 몽땅 몰려 정신이 없다. 저자가 써낸 글이 손 댈 데 없는 소설이라면 별로 할 일이 - 이것도 골치 아프긴 하다. 포장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하니까.. - 없는 편이지만 다른 원고의 경우는 일단 원고가 나온 후부터 해야 할 일이 많고도 어렵다. 그 가운데서도 그 일 내용이 무엇이든 매순간 의사결정을 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 그런데, 이 가장 어려운 일이 바로 기획자이며 작은 규모의 팀을 이끄는 팀장이라면 가장 잘해야 하는 일이자 핵심적인 일이다.

 

처음 아이디어가 떠오른 순간부터 필자를 만나는 일, 원고를 받은 후 원래 아이디어가 한 권의 책으로 살을 붙여가면서 컨셉이 바뀌는 과정, 그에 맞게 디자인, 포장까지 가는 길에는 곳곳에 결정해야 할 일 투성이다. 결정을 잘 하려면 신중해야 하는 건 기본이지만, 그러면서도 결단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과감하고 신속한 판단이 아주 중요하다. 문제는 내가 제일 못하는 게 바로 이거라는 것. 남들 얘기를 잘 경청하는 건 좋으나 늘 귀가 팔랑팔랑 날아다니고, 일단 결정을 하고 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게 두려워 결단을 내려야 하는 최후의 일각까지 머뭇거린다. 이러니, 일을 진행해가는 과정 전체가 거대한 결단의 고비들을 타고 넘어가는 롤러코스터처럼 느껴진다. 우윽, 멀미 나!

 

그러다가 원고 교열 과정에 들어서면 신세계가 펼쳐진다. 대범한 결정과 신속한 결단보다는 시간과 정성을 들여 한 자, 한 자 짚고 넘어가야 나중에 후회할 일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한없이 쪼잔해져야 하는 거다.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사실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한 내용을 확인하지 않은 채 그냥 넘어갔다가는 꼭 걸려 넘어질 일이 생긴다. 설사 나 말고 아무도 모르는 문제라고 해도 자신을 속일 수는 없는 법. 이 일을 하는 동안은 파고 또 파고 들어간 극한의 갱도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기분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교정을 위해서는 매뉴얼이, 교열을 위해서는 사전과 보충 자료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즈음에는 다른 책을 볼 엄두가 나지 않기도 하려니와 어렵사리 다른 책을 볼 때도 어느새 교정 모드로 책을 읽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망연자실해지기도 한다.

 

요즘 출판사 편집부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은 대개 '편집기획자'로 불린다. 그런데, 이 이름으로 살아가다 보니, 이것만큼 극명한 모순을 안고 있는 말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대범하고 빠르게 잘 결단해야 하는 기획자와, 잘 아는 돌다리도 두들겨보며 건너야 하는 편집자는 과연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일까. 한 사람이 동일하게 갖고 있는 자질과 기대치로 동시에 완수해낼 수 있는 일일까. 이것도 어려운 것 같고, 저것도 어려운 것 같은 나로서는 둘 다 잘 하지 못하는 것만 같아서, 제자리 아닌 곳에 있는 것만 같아서 누가 뭐라지도 않는데, 괜스레 민망스럽다. 좋은 기획편집자란 무엇일까. 나는 그걸, 언젠가라도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제몫을 하며 세상을 사는 일이, 참 어렵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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