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일기

친구라는 타인

양화 2008. 12. 11. 14:43

 

 

드디어 첫 책이 나왔다!

어지간히 마음 고생을 시킨 탓에 모두가 건넨 축하한다는 말에 흔쾌한 마음이 되지 못했다.

그렇게 고생 고생하며 나와야 할 책이 아닌 것 같아서, 내가 아니었더라면 훨씬 쉽고 빨리 나왔을 것 같아서, 회사에 대한 죄책감과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 그런 게 먼저 솟구쳤다. 이렇게 고생하고 나온 책이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어 많은 사랑을 받게 된다면, 이 책이 나왔을 때 참 예쁘다, 참 대견하다, 스스로에게 참 고생했다고 말해주지 못한 미안함이 상쇄될 수 있으련만.. 그러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건, 이 책의 품질에 자신이 없어서는 절대 아니다.

 

이 책을 만드는 동안 나 역시 우정과 친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절친한 친구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소재 자체는 극적이지만 이들이 쌓아온 우정의 얼굴은 언젠가, 어디선가 본 듯 우리에게도 낯이 익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랬지만 난 우정이란 동 시대를, 비슷한 공간을 살아가느라 '너도 거기서 나처럼 살고 있는 거지?' 마음으로 묻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는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책임 지고 책임 지우는 가족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나약함이나 현실적 곤란함을 친구도 똑같이 느끼고 있을 테니까. 어떻게든 그걸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테니까. 약간의 시차와 사안의 경미한 차이가 있을 뿐.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그는 남은 가족에게 투정 한 번 부리지 않는다. 투정을 부린다고 안 받아줬을 가족이 아니겠건만, 가족은 그런 것이다. 대신 그는 친구에게 자신이 죽기 전에 해결해야 할 근심을 털어놓는다. 아무것도 안 먹는 남편에게 밀크셰이크를 만들어 가져다주고서 먹지 못해서 어쩌냐고 대놓고 걱정하는 대신, 내가 애써 만들어주었는데 왜 안 먹느냐며 투정부리듯 눙쳐야 한다는 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가족 행동 지침이다. 하지만 어두운 밤이 되면 슬프고 외롭고 불안한 마음을 그는 친구에게 흐느끼며 털어놓는다. "내년에도 내가 살아있을 수 있을까?" 하며.

 

하지만 이런 친구가 거저 얻어질리가 없다. 이 책 속의 두 주인공은 다섯 살에 처음 만나 친구가 되었다. 한 친구가 죽은 나이는 쉰여섯. 무려 50년 넘는 추억을 함께했다. 자신과 친구를 구별하지 못하고 구별할라치면 배신이라고 받아들이며 일탈과 반항조차 공유하는 10대의 우정을 지나, 두 사람이 전혀 다르게 존재하는 두 객체라는 것을 힘겹게 받아들이는 스물 초입, 그리고 각자의 사랑과 일에 매몰되어 우정 따위는 잊고 지내는 3, 40대. 친구라는 이름으로 그런 세월을 함께하지 않는 한, 그들의 애틋한 우정이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열여덟 무렵, 다른 대학에 진학하면서 밥이 잭을 따라 대학 신입생 절차를 밟으러 가는 길에 둘 사이를 어색하게 가로지르던 침묵이 바로 우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제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고 인정하는 순간 친구관계가 깨지기라도 할 듯 조심스레 유지하는 그 침묵의 시간. 친구라는 건 어느 정도 배제를 전제로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우리는 모두와 친구가 될 수는 없다. 내가 너를 인정하고, 네가 나를 인정하는 순간 우정은 완성된다. 밥은 잭을 떠나보내기까지 9개월 동안 그걸 했다고 생각한다. 네가 아프지만 그 아픔을 너처럼 아파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만약 우정이 우리가 알고 있는 관계 가운데 가장 완전에 가까운 것이라면 나는 그 점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친구를 떠나 보낸 밥은 그런 우정을 축복한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아무리 어려운 일도 서슴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건, 친구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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