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동호가 처음으로 부모나 동생없이 혼자서 캠프를 떠났다. 소심한 녀석이라 몇 번이나 괜찮겠냐고 물었는데, 컵스카우트 제복을 보는 순간부터 눈이 하트로 변해 바짓단을 줄인다, 허리를 줄인다 하며 입어보랬다, 벗어보랬다 해도 신나기만 했다. 허리띠며, 항건, 뱃지 같은 부속물이 주는 뭔가 근사한 느낌은 동호를 특히 사로잡았다. 어디로 가는지, 가서 뭘하는지도 캄캄이면서 그냥 신이 나있었다. 밤에 가방을 싸놓고, 아침엔 김밥을 싸고 아이를 보내놓고는 내 기분이 되려 이상해졌다. 그렇게 1박2일을 보냈는데, 녀석, 전화가 없어서기도 하겠지만 전화 한 통이 없다. 무슨 일이 있으면 외려 전화가 오겠지, 싶어 안심이다. 토요일 밤에는 사무실에서 일한다고 남편도 못 들어와서 둘째 석호랑만 지냈는데, 정말 기분이 이상했다.
일요일, 석호 녀석이 하루종일 툴툴대서 홧김에 집을 나와 돌아다니다 - 아니, 애들이 가출하는 게 아니라 뭐가 엄마가 가출?! - 집에 들어와 보니, 캠프에서 돌아온 녀석의 흔적만 남아있고, 두 놈 다 어디론가 사라졌다. 날이 어둑어둑해지는데도 올 생각을 안 한다. 애들 알 바 없다고 호기롭게 집을 나간 게 언제라고 슬금슬금 걱정이 된다. 이 녀석들이 어딜 갔나, 날이 어두워지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있는데, 애들이 들이닥친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일요일 점심은 라면 먹는 날인데, 엄마는 없고, 그렇다고 굶을 수도 없고 해서 형이랑 둘이 의논해 저희들끼리 인천대공원에 가서 사발면을 사 먹었다는 것이다.(3분이면 갈 수 있는 슈퍼에서도 사발면을 팔 건만... 그것도 훨씬 싼값에.. ㅜ_ㅜ) 간혹 일요일이면 거기 가서 사발면 먹고 축구 했던 게 생각난 것이다. 걸어가려면 한 30분 걸리는 꽤 먼거리인데다, 가는 길이 외진 숲길이라 가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무섭진 않았단다. 그럴까 봐 총을 가져갔다나?
어쨌든, 내겐 마냥 어린애 같은 것들이 저희들끼리 캠프도 가고, 그 먼길을 오순도순 다녀왔다는 게 기특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홀가분하기도 했다. 오호, 자유부인이 멀지 않았군.. 애들이야 내 알 바 아냐, 하면서 집을 나간 그때, 나는 고작 '메종 드 히미코'를 보았다. 내 눈길이 오래 머문 건, 교복을 입고 안전모를 쓴 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게이들만을 위한 양로원 '메종 드 히미코'에 매일 야유를 퍼부어대던 중학생이었다. 자신이 던진 물풍선에 맞은 게이가 자신에게 뺨을 때리며 다가와 "다음에 또 그러면 죽일 거야"하고 노려볼 때, 그 남자를 맞보던 그 아이의 눈이 마음에 남았다. 그 아이는 그후, 늘 몰려다니며 게이는 떠나라고 낙서를 해대고, 놀리고 도망가던 친구들에게 "너희들이 나랑 친구 안해도 좋아" 하고는 메종 드 히미코에 찾아가 그들을 돕겠다고 예의 바르게 말한다. 함께 경단을 만들고, 식탁 차리는 것을 돕고, 밥을 먹고는 잘 먹었다고 인사하고 떠난다. 떠나기 전, 그 아이는 잠깐 동안 열린 문틈으로 자신을 때리고 위협했던 게이 청년을 응시한다.
그 순간 자란다는 건 자신이 미처 알지 못한 어떤 한 세계를 온전히 만나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로 하더라도, 우리에게 상식적으로 열려있는 어떤 세계 너머의 다른 세계를 접촉하는 일. 그것은 때로 충격이고 혐오겠지만 차츰 그것이 이 넓디 넓은 세상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 아이가 게이 청년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칠 때, 그 아이는 또 다른 세계를 만났다. 그렇게 만난 세계를 부정하지 않고, 날 친구라고 하지 않아도 좋아, 라고 말하던 순간, 그 아이는 자랐다. 사오리가 유산을 안 받아도 좋으니 몸에 마비가 온 루비를 거두자고 말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정과 사랑을 경계를 시험해보다 실패한 하루히코가 "호소카와랑 잤다며? 술에 취해 자세히도 얘기하더군. 그가 부러웠어"라고 말할 때 역시. 호소카와와 하룻밤을 보내고서 울던 사오리가 "내가 우는 이유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라고 말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날 용서할 수 없다는 게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라면서도, "널 참 좋아한다"고 히미코가 사오리에게 말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따뜻하고 유쾌하다. 그런데도 마음 한 켠이 쓸쓸해지는 건, 산다는 건 어떻게 해도 그만큼의 그늘이 있다는 것 때문이다. 게이임을 드러내고 원하는 대로 살아도, 그렇지 않은 채 정상인들 틈에 섞여 그들과 비슷하게 살아도, 누군가를 사랑해도, 또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아도 삶은 밝은 만큼 어둡다, 슬픈 만큼 즐겁다. 그렇게 생각하면 훨씬 마음이 가벼워진다. 엄마 생각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이 툴툴 대는 아이들도 언젠가 제 할 일은 제가 알아서 한다며 엄마 따위 거들떠 보지도 않을 거고, 장난감 총을 지니고 처음으로 혼자 대공원을 찾아가면서 만난 세상은 엄마와 함께 갈 때와 달라보였을 것이다. 아이들은 매순간 새로운 세상을 만날 것이고, 아이들만큼 자주는 아니겠지만 나 역시 그럴 것이다. 모든 성장에는 아픔이 따르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그러니, 그럴 때마다 그저 주문을 외우자. 사오리가 보고 싶다. 피키피키 피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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