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일기

여행서의 비밀

양화 2008. 4. 22. 13:34

여행서 원고를 들여다 보면서 참고 삼아 다른 여행책들을 많이 보고 있다는 얘기는 했고,

또 다른 여행서 기획안이 떨어져서 이번엔 국내여행서들을 살펴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든 하나의 깨달음은 여행지와의 거리와 실용성의 정도는 정확히 반비례한다는 사실이다.

 

많이 대중화되었다고 해도 해외여행은 일반인들이 그렇게 쉽게 할 수 없다. 그러니, 해외여행에

관한 한 낭만과 환상은 많을수록 좋다. 사람들은 거기 가봤던 사람들에 의한 대리체험에 대해

거부감이 별로 없다. 그러니, 미지의 여행지에 대한 극단적인 미화와 감상적 채색도 상관없는 것이다.

아니, 크면 클수록, 하면 할수록 더 좋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간략한 지도를 들고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곳에 대해서는 다르다. 찍힌 사진의

이미지에 혹해 가는 길에 대한 안내를 붙들고 당장 달려갔는데, 내가 저자와 느낀 게 전혀

다른 거라면, 속았다는 불쾌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당연히 책에 대해 호감을 갖기가 어렵다.

그들에겐 그럴듯한 그림과 사진보다, 정말 잊지 못할 맛의 음식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 값이 싸면서

까슬까슬 깨끗한 이불이 있는 숙소에 대한 등급별 정보가 더 요긴하다.

 

여행책을 읽고 있노라니, 멀미가 날 지경이다. 난 사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여행보다 정착이 좋다. 예측 가능한 일상이 있는 곳, 그래서 여행기보다는 체류기가,

체류기보다는 정착기가 더 좋다. 늘 한결 같은 맛의 커피, 새벽 5시 50분이나 6시 40분의

기상, 똑같은 루트의 출퇴근길, 저녁 8시 40분 OCN의 CSI 재방송과 함께하는 

러닝머신 위에서의 1시간, 도브 목욕샴푸의 라벤더 향, 보들보들한 아이들 뺨 위에 뽀뽀,

같은 서랍에 든 속옷들, 구급 약품통의 변함없는 자리, 남편의 주름지는 눈웃음... 

 

그런 한결 같은 것 속에서 작은 변화를 감지하는 것이 더 좋다. 가령, 집에 돌아가는 길의

가로등이 저녁 7시 20분쯤 일제히 켜진다는 사실, 그게 이틀이나 사흘이 지나면 1분씩 늦어지다가

하지가 지난 후부터 1분씩 다시 빨라지기 시작한다는 사실. 목련이 피고 지고, 다시 벚꽃이 피고 지고,

이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연녹색 잎들이 나왔다는 사실을 매일매일 새롭게 발견하는 게 더 좋다.

 

언제까지나 꽃을 달고 살 수는 없다.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들은 다른 것보다 꽃을 더 빨리

떨궈야 한다. 그러고 남은 잎들은 모두 똑같기만 한 것은 아니니까, 난 삶이 꽃 같기보다

그저 잎사귀 같기를 바란다. 그 잎사귀 너머에 또 다른 것이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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