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말 이게 현실일까? *
이 영화의 감독 전작인 '싱글스'도 그랬고, 얼마전 개봉했던 '어깨 너머의 연인'도 그랬(다고 하)고(안 봐서 소문만 들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공감하며 많이 읽는다는 정이현 소설(특히 장편)을 읽을 때도 그렇고, 이른바 미혼 여성 혹은 결혼을 한 젊은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나 소설을 볼 때마다 내가 사는 세상은 딴 세상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세상은 변했는데, 집안에 틀어박혀 있느라 그걸 모르고 지나가 이렇게 생경하게 느껴질 뿐 진짜 세상은 그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다. 요즘 들어 내가 접하고 있는 세상이 여러 면에서 실제 세상과는 뚝 떨어진 진공 상태의 세상인 것 같기도 하고 해서 마음이 복잡하던 차라 영화를 보는 내내 눈만 스크린 겉을 훑고 있었을 뿐, 마음은 저 먼 데를 헤매다녔다.
27살의 시나리오 작가 아미(김민희 분)는 1년째 같은 시나리오의 엔딩을 고치고 있다. 럭셔리한 호텔은 못될 망정 하다 못해 적요한 분위기만으로 영감을 불러들일 것 같은 절간도 아닌 방음장치도 안된 여관방에서 게으름뱅이 감독과 작업 중이다. 연인이 있지만 아직도 데뷰 못한 홍대 앞 밴드 멤버인 원석(김흥수 분)의 처지는 그나마 기댈 데 있는 아미보다 못하다. 아미의 언니이자 강애의 엄마인 41세의 인테리어 디자이너 영미(이미숙 분)는 능력도 인정 받고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지위를 누리면서 연극하는 후배의 무대미술을 도와주면서 허영심(?)도 채운다. 그런데, 무대 미술하면서 만난 경수(윤희석 분)가 귀여워 한번 놀아줬더니 그 다음부터 자꾸 들이댄다. 성가시면서도 기분이 묘하다. 영미의 딸 강애(안소희 분)는 여고생. 아르바이트도 하고, 귀여운 연애도 해가며 살고 있지만 스킨십에는 도통 관심없는 남친을 어떻게 꼬셔볼까 연습하다가 그만 연습 상대였던 친구에게 묘한 감정을 품게 된다.
이것이 대략적인 이 세 여자의 현재 상태다. 일은 안 풀리고, 연인은 갑갑하던 차에 이모의 성화에 맞선 자리에 나간 아미. 지루한 7:3 가르마와 썰렁한 유머감각만 아니라면, 결혼상대로 그만인 남자 승원(김성수 분)을 만난다. 엉망진창 망가진 모습을 보였음에도 호의를 보이는 이 남자에게 마음이 흔들린 아미는 본격적인 갈등에 돌입하고, 이제 겨우 40을 갓 넘기고 폐경을 선고받고 심난해 죽겠는 영미는 자꾸 엉기는 연하 경수 때문에 마음이 복잡하다. 남친에게 과감하게 스킨십을 시도해봤지만 친구에게 했을 때 같은 삐리리한 감정이 안 느껴진 강애는 성 정체성에 심각한 혼란을 느끼며 괴로워한다. 이들이 겪고 있는 문제는 내가 지나왔거나 지금 막 겪을 만한 문제들이다. 하지만 전혀 감정이입이 안된다는 것 때문에 나는 놀랐다. 이들은 그럼 도대체 어느 나라 여자들이란 말인가.
싱글즈에서도 그랬지만 결혼하기에 완벽한 조건의 남자가 나타나 결혼해서 외국으로 데려가 주인공 여성을 공부시켜주려 하겠다는데, 여자가 늘 마지막에 결정을 번복하는 이 구조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미혼여성이 결혼은 치열하게 싸우거나 견뎌야 할 현실을 떠나 좀더 아늑하고 편안한 어떤 상태로 가는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다는 의미일까. 하지만 이미 결혼이라는 땅으로 넘어온 사람들에게는 그게 훨씬 새롭고 더 복잡한 다른 현실로 들어서는 일이라는 게 너무 뼈저리니 도통 이 아가씨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승원이 잘못된 젓가락질 습관을 고쳐주려 하면서, "처음엔 좀 힘들지만 조금만 익히면 이게 더 편하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젓가락질 잘 못해도 밥만 잘 먹는다던 아미는 게다가 미국 비자를 받으려 학원강사이자 통장 잔고 2천만원을 가진 여자인 체 해야 한다. 아미는 "그건 내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미국 비자를 받지 않아도 되는 다른 남자를 만난다 하더라도 결혼이라는 현실은 젓가락질을 새로 익혀야 하는, 자기라는 존재를 조금은 희미하게 만들어야 하는 일이라는 걸 알아야 할 거다.
하지만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나와 나이가 비슷한 캐릭터인 영미. 사회생활이라는 걸 계속 해서 안정된 지위에 오른 여성이라면, 그도 아니면 아이가 자라 한 고등학생 쯤 되면 그럴 수 있는 것인지 둘 다 아직 겪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모르겠으나 한 아이의 엄마인 중년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자기 존재, 사랑인지 뭔지 모를 감정의 혼란 앞에서라곤 하지만 아이에 대해 단 한 순간도 고민하지도, 생각하지도 않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딸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학 입시를 목전에 둔 고등학생이라지 않은가!! 카메라에 잡히는 순간들이 모두는 아니고, 각별히 그런 장면만을 골라 담아서라고 혼자 변명해 본다고 해도 역시 이해 불가. 싱글즈의 동미가 마흔 한 살이 되면 그렇게 될까. 아이를 키울 때는 어땠을까. 처음 아버지도 없이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했을 때, 아이는 어리고 일은 해야 하고, 아이라도 아플 때 영미는 어떻게 했을까. 이렇게 나래를 펼치다 보면 딸자식에 대한 영미의 초연함은 그런 고비들을 겪은 후 얻어진 득도 수준의 평온일까 싶어지기도 한다.
세 여자가 술집에 모여 술을 마시다 옆자리 아저씨들이 좀 조용히 하라고 하자, 대드는 저 위 장면을 보면서 여동생에게 섣불리 자신의 경험을 재료 삼아 훈계를 늘어놓지도 않고, 딸이라고 제 소유물이기라도 한 것처럼 노파심 섞인 잔소리와 섣부른 협박을 해대지 않는 영미가 멋져보이긴 했지만 과연 그것이 현실일까 하는 의구심은 가라앉지 않았다. 아이를 낳고 난 후, 아이를 내 삶의 한 부분, 내 자아의 한 부분으로 쉽게 받아들여지기보다 아직도 입덧을 하듯 때때로 이물감을 느끼면서도 애착인지 집착인지 모를 감정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로서는 그 쿨함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뿐이다. 원고 마감을 앞두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면서도 일의 흐름을 끊고 매 끼니 나가 가족에게 밥상을 차려주고 설겆이를 해놓고 들어와야만 하는 상황, 남편이 없고 아이들이 잠들지 않으면 블로그질조차 할 수 없는 상황, 매번 볼 만한 영화제를 스크랩해놓고도 단 한번도 다녀올 수 없는 상황, 남편이 집에 있어도 개인적인 용무로 집을 나설 때 어디 가냐고 물으면 웬지 미안하고 면목없는 상황. 이런 상황들을 사는 나로서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지상 과제인 이 여성들이 진짜 내 이웃이라면 내 삶은 소수의 삶이고 어딘가 잘못된 것이겠지.
애들 영어공부하는 사이 앉아 기다리노라면 아이들 교육문제에 관해서만 떠드는 것으로 1시간 30분이 짧은 그 수많은 엄마들(옆에서 듣고 있는 것만으로 지치고 질린다), 만약 그게 현실이 아니라면 그녀들은 영미 같은 고민들을 도대체 어디에 숨겨두고 있는 것일까. 잘 나가는 매력적인 커리어 우먼이 되어 연하남의 대쉬를 받을 수 없는 그녀들은 그 대신 아이들의 성취를 자신의 성취로 대신하고 있는 것일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외부로 나가는 출구들이 하나씩 닫혀가고 그럴수록 자신을 위해 일하고 욕망하고 고민하는 에너지는 의식의 수면 밑으로 가라앉는다. 그것이 누구에게든, 그 어느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부정적인 에너지가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영화는 환타지일 뿐, 이라고 말하면 그뿐이겠지만 이게 누굴 위한 환타지인지, 혹은 누구의 환타지인지는 알고 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싱글즈의 장진영이 했던 것처럼 아미가 연인의 배신을 겪고 여자 친구들을 만나 푸념을 하는 장면은 그러려니 했지만 아무리 술이 취했다고는 하지만 연인의 배신 직후, 다른 남자를 육체적으로 탐하는 것도 사실 잘 이해가 안 갔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여자 친구들을 대화의 우선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것도 사실 이상했다. 어쨌든 여자들이 나오는 영화를 볼 때면 늘 나의 리얼리즘 감각에 당황하게 된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는 멋진 영화를 보면서 김정은이 분한 김혜경의 친정 엄마가 김치를 김치통에 담는 장면을 보고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내내 마음에 걸렸다. '저렇게 손에서 김치 국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김치통을 만지다니, 나이 드신 분들은 비닐 장갑은 안 쓰시지만 보통 얼른 행주로 닦으시는데....' 싶어 영화를 보는 동안 안절부절했다. 김치 국물 묻은 손과 김치 국물이 묻은 김치통을 얼른 닦아야 할텐데 싶어서 말이다. 정말 난감한 리얼리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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