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러갔다

2007 언급해 두고 싶은 영화 세 편

양화 2007. 11. 26. 20:28

1. 궁녀

 

여성의,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영화. 주인공이 모두 여자고, 감독도 여자다. 그래서 이 영화는 여성의 욕망을 그리는 데 충실하고 나아가 설득력이 있다. 궁에서의 궁녀는 그 삶이 거의 알려져있지 않다 보니, 상상력이 싹트기에는 최적의 장소다. 어쩌다 왕의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왕이 되어 이름을 남기기도 하지만, 그 삶은 역사의 시각에서, 또 남성의 시각에서 왜곡되어 있기 일쑤다. 그래서 여성의 시선으로 그들의 삶을 재건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거늘, 재밌는 데다 말까지 된다. 궁에서의 여성의 욕망을 여러 궁녀들의 모습을 통해 다양한 층위에서 접근하고 그것들이 차츰 정점을 향해 올라간다. 그 욕망의 끝은 바로 자신의 손으로 왕을 만드는 것. 미스테리에서 서서히 호러로 흘러가는 흐름도 자연스럽고 이심전심으로 전해지는 자매애에 대한 묘사도 깔끔하다. 이런 제목의 사서가 없다는 것을 잘 알아서 불편한 제목이긴 한데, '조선왕비실록'을 참고 삼아 읽어볼 마음으로 책을 사두었다. 올해의 영화로 한 표!

 

2. M

 

한 영화주간지에서 "M의 문제는 낯설다는 게 아니라 너무 익숙하다는 것"이라고 쓴 걸 보았는데, 그 말이 딱 맞다. 이 영화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악몽으로 돌아온 첫사랑'쯤이 될 텐데, 순정한 마음으로 만든 감독의 전작 '첫사랑'의 음화판 같다. 첫사랑이 악몽이 된 이유는 망각이었고, 그 망각을 일깨워 한바탕 악몽을 꾼 뒤 마치 한을 털어버린 처녀 귀신 이야기처럼 산뜻해지는 것도 어쩐지 개운치 않고, 빛과 어둠, 꿈과 현실, 의식과 무의식.. 이런 것들이 딱딱 대칭을 이룬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너무 진부하잖아~~ 예전에 소시민의 감수성을 디테일하게 보여주던 그 이명세로 돌아왔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품어본다. 불미스런 사건으로 영화를 떠났던 송영창의 얼굴이 반가웠다. 대학 1학년 때 '연극의 이해'라는 교양과목에 초대 손님으로 온 적이 있었는데, 대학 1학년 아가씨의 로망을 그대로 옮겨놓은 모습이었다.. '연예인'이 온다는 말에 내 강의가 아닌 데도 구경갔던 기억이 난다. 가을이었고, 낙엽이 드문드문 떨어진 학교 길을 트렌치 코트를 입고 서서히 사라지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3. 데드 걸

 

한적한 시골 과수원 고랑에서 한 여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영화는 발견된 그 시체와 연관된 몇몇 여성들의 삶이 펼쳐진다. 이 시체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는 여성들의 삶은 도무지 출구가 없어보이는 암담한 삶이다. 각각 The sister, stranger, mother, wife, dead girl 이라는 제목의 에피소드들이 연결된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배우의 얼굴이다. 배우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모아서 조촐한 사진집을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제목은 뭐가 좋을까. 제목 짓는데는 영 젬병이니, 그냥 넘어가자. 확실한 건, 이 사진집을 보는 사람들이 불편해질 거라는 것이다.  처음엔 불편하다가 그 다음엔 연민이 생겼다가 곧 자신의 얼굴이 떠오를 것이다. 남편의 비밀을 앎으로써 지리멸렬한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꿔버릴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 비밀을 불 속에 넣어 태우는 와이프의 불안한 얼굴이 너울대는 불길에 기묘한 그림자를 드리우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데이트 신청을 받고는 머리를 감고 입술에 붉은 연지를 칠하던 스트랜저의 이상하게 번쩍이던 눈빛도. 그 얼굴들은 불안, 죄책감, 절망, 그런 삶의 조각들이 다른 사람에게 그렇듯 내 삶 역시 이루는 구성요소들이라는 걸, 어느덧 깨닫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