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중년의 독서 취향

양화 2007. 11. 5. 18:08

열변을 토하는 것은 싫다. 내가 선호하는 예술은 세련되고 절제되고 잘 탁마된 것이다. 감동적인 것보다 재치 있는 것이 좋고 현실적인 것보다 예술적인 것 혹은 인위적인 것이 좋다. 이제는 소설보다 역사나 전기가 더 매력적이다. 현대물보다 고전이 더 마음에 와 닿는다. 셰이커 교도의 단순함이 내게 호소한다. 또 탈레랑은 이렇게 조언했다. "Surtout pas de tropzele(무엇보다도 열광이 없어야 한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런 근엄한 취미는 분명 중년의 표시이고, 너무 많이 글을 읽고 또 육체에 피로를 느끼는 자의 결과이다. 그래서 말라르메는 '바다의 미풍'에서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던가. "육체는 슬프다. 아아! 그리고 나는 모든 책을 읽어 버렸다.... 나는 이제 모험가라기보다 식도락가로서 독서에 나선다"    p. 382

 

오픈북, 마이클 더다 지음

 

'젊은 독서가의 초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오픈북>은 '워싱턴 포스트'지의 서평 기자인 마이클 더다가 자신의 독서인생을 적어내려간 것이다. 대부분의 독서일기 류의 책들은 내게 언제나 죄책감과 시기심이 뒤엉킨 마음 상태를 끌고 가다가 조급함으로 책을 덮게 만든다. 이들이 읽은 이런 책도 읽지 못한 나는 뭔가 하는 죄책감, 그들이 경험한,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독서의 황홀경에 대한 시기심 끝에 어서 이들이 맛본 그 감정을 나도 경험하고 싶다는 조급함이 마음을 짓누르는 것이다.

 

오픈북은 그런 점에서 비교적 읽기가 수월했다. 어린 시절에 읽었다던 모험소설, 추리소설 같은 것은 대단히 미국적인 책들이라 아예 무슨 책인지 모르겠고 또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고, - 난 미국 청소년이 아니란 말이다, 아이들에게 그걸 전범으로 강요할 생각도 없고 - 귀에 익은 고전들이 줄줄이 나오는 중, 고등 시절은 거부감없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뚱뚱하고 근시에다 어눌하고 운동도 못하는 어린 시절의 더다가 어떻게 독서의 세계에서 위안을 얻었는지(나는 그 크리스마스를 잊지 못한다. 아주 추운 밤이었지만 따뜻하고 편안한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매혹적인 책을 읽은 것이다.... 그것은 워즈워스가 말한, 인생의 기력을 회복시키는 '한 점의 시간(a spot of time)이었고, 잡티가 전혀 들어 있지 않은 완벽한 행복의 시간이었다(p. 99)에서부터 내 마음은 충만해졌다.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중고등학교 시절에 남들보다 좀더 나아갔던 독서를 자양분 삼아 겉멋과 삐딱함으로 자기 허영과 자아를 채우며 성장하는 모습에서는 독서광을 자칭, 타칭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조금씩 겹쳐져 낄낄거리게 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중고등학교 시절을 어떻게 빠져나오리.. (나를 매혹시킨 것은 속도가 아니라 실종이라는 아이디어였을 것이다. 그 실종의 개념에는 자신의 내면적 운명을 성취하려는 인간은 일상적인 생활을 초월해야 한다는 뜻이 깃들어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또 무엇인지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타자가 되기를 꿈꾸었다. 급격한 존재의 변화 속에서 성취감을 발견하고자 했다. 많은 소설 속 주인공이 그러하듯이 나는 변화를 추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가출했다. p. 169)

 

뛰어난 학생들로 인해 좌절감과 수치심, 시기심을 맛본 대학 시절, 그는 질풍노도의 시기에서 근면의 시기로 넘어간다. 잘난 체하는 태도를 버리고 열심히 공부하는 공부벌레가 되어 24시간 공부에 매달리는 대학시절. 증권회사에 취직하거나 돈 많이 버는 CEO 따위는 그들 대학시절에는 없었다. 나는 시를 외우고, 수업시간에 작성한 노트를 보고 또 보고, 수업과 관련된 평론들을 몽땅 읽고, 시의 의미와 구조를 깊이 생각하며 연필심을 날카롭게 다듬는 더다의 대학시절을 읽으면서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가가 뜨뜻해졌다. 나 스스로 한번도 그런 시간을 가져보지 못한 탓이다. 그를 그런 학생으로 이끈 대학의 교수님들이 또 어찌나 부러웠는지.

 

무엇보다 나는 그가 에필로그에서 고백한 중년의 독서취향에 완전히 공감하고 말았다(나는 그렇게 많이 읽지도 않았지만). 오갈 데 없는 중년이 되었다는 것보다, 이렇게 간명하게 중년의 독서 취향을 포착한 것을 보니 동지를 만난 듯 반가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년의 징후. 그가 프랑스 연수에서 거리의 악사 대신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연주가 끝나고 제법 많은 돈을 거둬들인 그 악사가 그에게북부 이탈리아에서 코트 다쥐르를 거쳐 스페인의 코스타 델 솔에 이르는 남유럽 해변 지대의 구걸 루트를 함께 돌아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으나 그걸 거절한 것을 후회하는 장면이었다. 내게도 그런 것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아마도 그런 일이 있었대도 나는 더다와 똑같이 행동하고 지금에 와서 젊은 날 가지 않았던 그 길에 대해 후회하고 있을 것 같다.

 

매끄러운 번역, 소박한 문장 속에 담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진심어린 이야기들. 적절하고 날카로운 인용문들.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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