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내가 인간인 것이 너무 좋았다. 음악을 들을 수 있고, 때로는 음악에서 위로를 얻고 제 마음을 실어 노래까지 부를 수 있는 인간인 게 좋았다. 하지만 더 좋았던 건, 절정 따위 없을지라도 삶을 살아가는 그냥 인간이라는 게 좋았다. 삶의 한때들이란 우리를 절정으로 데려다 주는 징검다리일 뿐이라는 생각은 어리석었다. 그 한때는 그 한때로서 완전무결했다. '원스'는 그걸 보여준다. 아니, 깨닫게 한다. 느끼게 한다. 사랑 영화면서 설레게 하지 않고, 꿈에 관한 영화면서 들뜨게 하지 않는다. 구질구질한 삶에 관한 영화면서 답답하게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서서히 가슴을 무언가로 차오르게 하다가 일순 툭 터지게 한다. 가슴 위로 삶에 대한 감사와 헌사의 더운 눈물이 흐르게 한다. 사랑이 있는 한 삶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며 결코 황량하지 않다.
그 남자는 거리에서 노래를 하고 아버지를 도와 진공청소기를 수리한다. 그 여자는 거리에서 꽃을 팔거나 잡지를 팔고 남의 집 파출부로 일한다. 아무도 듣지 않을 시간을 골라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남자 앞에 나타난 여자는 노래 속 여자가 누구냐고 말을 건다. 진공청소기 수리도 한다는 말에 여자는 다음날 고장난 청소기를 가져오기로 한다. 그저 말로만 했던 약속을 진심으로 믿어버린 여자에게 남자는 뜨악해졌지만 그녀가 연습 삼아 피아노 치러 간다는 악기점에서 서로를 달리 보게 된다. 여자는 남자가 만든 음악을 듣고 그의 음악을 담아 가져오고 가사가 없는 노래에 제 마음을 담아 가사를 붙여보기도 한다. 남자는 여자의 북돋움에 자신의 노래를 제대로 녹음해 런던으로 떠나기로 한다. 녹음실을 빌리고 거리의 악사들과 여자의 도움으로 노래를 녹음한 남자는 여자에게 함께 떠나자고 청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화려하게 번쩍이는 절정 한 번없이 한 여자와 남자의 한때들이 보여진다. 밥을 먹고, 아이를 어르고, 오토바이로 바다까지 드라이브를 하고, 그리고 노래를 한다. 남자와 함께 노래부르기 위해 기타 줄을 오르내리는 손가락을 바라본다. 여자가 피아노로 무엇을 말하는지 움직이는 손가락을 들여다 보다가 눈을 맞춘다. 악기판매점은 순식간에 관객 하나 없는 작은 연주회장이 된다. 그것으로 좋다. 사연 한 가지씩 품은 듯한 얼굴들이 파티에 모여 소박하게 노래를 한 소절씩 부른다. 그리고 밤샘 녹음을 마친 멤버들이 바닷가를 거닐며 논다. 특별할 것 없는 모습이건만 마음이 미지근해진다. 그 미지근함은, 어른이 되고서도 아직도 엄살이나 피우는 나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온갖 일을 하면서도, 불평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고 천박해지지 않으면서 그 삶을 받아들여 견디며 성숙해지는 그 여자를 보는 일은 부끄러웠다. 품위, 라는 건 이런 데 쓰는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피아노를 치던 여자가 문득 창밖을 내다 본다. 그녀에게서 카메라가 멀어지면서 그녀가 사는 거리, 마을이 부감 화면으로 보인다. 나는 생각한다. 그녀가 연주하는 음악이 그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바람처럼, 햇살처럼 세상을 휘감는 것을. 아름다웠던 한때, 우울했던 한때, 사랑에 빠졌던 한때, 울었던 한때, 웃었던 한때. 모든 이의 한때들이 세상에 조화롭게 어울리는 상상을 한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인천에서 아는 유일한 레코드점에 들러 OST를 샀다. 음악을 듣는 동안, 사람이 사람을 완전히 믿고 소통하고 이해할 수 없지만 음악이 연주되는 그 짧은 시간만큼은 사람 사이는 완벽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만큼은. 그래서 '원스'의 음악을 들을 때면 언제나 행복해지고 따뜻해질 것 같다. 11월도 한참 기운 늦가을, 초겨울에 그 여자의 손을 감싸고 있던 손가락없는 장갑과 그 남자의 목에 매달려있던 목도리 같은 영화.
내 마음에 남았던 장면 하나. 가끔 이 다음에 아이들이 자라서 내 상식과 판단으로는 말도 안 되는 어떤 일을 한다고 나섰을 때, 넌 안된다거나 그러지 말라든가 이럴 것 같아 두려워지곤 한다. 아들이 하루의 대부분을 낡아빠진 기타를 들고 길거리에서 노래하고 (외면상 구걸하러) 다닌다는 걸 알면서도 잔소리 한번 않던 아버지, 녹음 준비를 하기 위해 연습하고 있는 아들과 그 친구들에게 차와 쿠키를 말없이 가져다 주고, 녹음한 노래를 들려주자 '멋지다'고 말하면서 너를 위해 모아둔 돈이 있으니 그걸 갖고 꿈을 펼치러 떠나라고 말하는 아버지. 우리 아이들이 자라 자신이 한 일을 칭찬받고 싶어 눈치 보듯 내 눈을 슬쩍 바라볼 때, 나는 그런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안으로 밖으로 얼마나 단단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나도 그러고 싶다. 빙긋 웃으며 "다시 한번 들어보자꾸나."
그리고 또 한 장면. 녹음실 사용료를 구하기 위해 양복까지 차려입고 만난 소액 대출 매니저. 대출을 할지 말지 결정하기 위해 엉성하게 녹음한 음악을 듣다가 그는 말한다. "쇼 좋아해요?" 그리고는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한다. 웃기면서도 슬프고 아름답던 그의 역시 한때.
http://link.brightcove.com/services/link/bcpid1125869268/bctid1150082248
뮤직비디오를 여기서 바로 볼 수 있게 링크를 걸려고 했는데, 왜 안 걸어지는 것입니까? ㅠ_ㅠ 하여 그냥 링크만 해두었으니 구경하세요. 사랑하게 될 겁니다. ^^ 너무 답답해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그 세세한 결들을 표현하기에 제 글이 너무 초라하고 부족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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