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캘린더
오가와 요코 지음/김난주 옮김/이레/192면/2006
‘임신캘린더’보다 같은 작가의 작품인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먼저 본
사람이라면, 이 책의 묘한 정서가 낯설게 다가올 겁니다. 특별한 단어를 사용하거나 독특한 소재를 다룬 것도 아니면서 읽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등골을 차가운 손가락 같은 것이 훑고 지나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표제작인 ‘임신캘린더’만 하더라도, 제목이나 일기형식으로 쓰여진 형식으로만
보자면 아이의 탄생을 기다리는 젊은 엄마의 설렘이 담겨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임산부의 여동생 시점에서 쓰여진 이 글은 오히려
임신이 가져온 일상의 미묘한 균열과 변화가 대한 반발이 담겨 있습니다. 별 감정없이 언니의 입덧을 전하는데, 그 말투 속에서 동물로서의 인간의
몸에 대한 미미한 경멸이 전해지고, 인간의 염색체를 파괴시킨다는 PWH가 함유된 수입 그레이프프루트로 잼을 만들어 먹이며 아이의 파괴된 얼굴을
떠올리는 여동생의 생각 속에는 언니가 갖고 있는 임신에 대한 거부감이 비쳐 보입니다.
‘기숙사’나 ‘해질녘의 급식실과 비 내리는
수영장’은 장소가 만들어내는 정서가 돋보입니다.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던 사촌 동생, 기숙생들이 드문 낡은 기숙사. 그릇이며 선반까지 물기없이
바싹 말라 있는 햇빛이 비쳐드는 초등학교의 급식실. 이 공간들은 평소에는 모두 생기있고 활기찬 기운이 넘치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이 어느
순간 기묘하게 보이는 순간을 포착하고 그런 분위기에서 있을 법한 사건을 버무려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닙니다.
일상이 특별히 행복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별 사건도, 긴장도 없는 일상은 때로 축복일 때가 있습니다. ‘임신캘린더’를 읽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더 듭니다. 임신이라는
사건도, 갑작스런 누군가의 연락도 없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니까요. 하지만 일상 속에 숨겨진 낯선 얼굴, 작가의 말대로 “양파가 싱크대 밑
수납장에서 아무도 모르게 고양이 시체로 변화하는 과정” 속에 소설의 진실뿐만 아니라 삶의 진실도 존재하는 게 아닐까요?